결성 25주년을 맞은 밴드 크라잉넛의 멤버들. 사진 드럭 레코드
결성 25주년을 맞은 밴드 크라잉넛의 멤버들. 사진 드럭 레코드

“밴드는 우정을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투어는 밴드를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미국 밴드 스트록스의 보컬 줄리안 카사블랑카의 명언이다.

실제로 그렇다. 의욕만으로 시작한 밴드 대부분이 온갖 이유로 데뷔도 못 하고 깨진다. 친구들끼리 만든 밴드라도 일단 깨지면, 서먹해진다. 모든 이별 이후가 그렇듯이. 하루 24시간을 붙어 있어야 하는 투어, 즉 공연은 밴드 해체의 주원인이다. 결국 모든 것이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좋은 예가 밴드 ‘크라잉넛’이다. 1995년 결성한 이래 지금까지, 그 흔한 멤버 교체 한 번 없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들이니 밴드 그 이상의 존재로 계속 음악을 해온 것이다. 결성 25주년을 맞아 크라잉넛이 ‘베스트앨범’을 발매했다. 그동안 발표한 노래 중 16곡을 추려 다시 녹음했다. 대부분이 2010년 이전에 발표한 초·중기의 곡이다. 그만큼의 세월을 먹고 자란 음악이다. 20대에 연주하고 부른 곡을 40대 중반에 다시 녹음했다. 중년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멤버들의 연주력은 일취월장했고 보컬 박윤식의 목소리가 살포시 두꺼워졌지만, ‘원숙’보다는 ‘젊다’는 단어가 여전히 어울린다. 거리와 무대에서 대부분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산소가 부족할 만큼, 많은 인원이 몸을 부딪히며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들이켜며.

1996년 겨울,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 첫 주말, 가장 먼저 간 곳은 홍대 앞에 있는 라이브클럽 ‘드럭’이었다. 그때 그 근방은 상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수역이 생기기도 전이었으니, 아직은 외진 곳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그라피티가 가득했고 형형색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것도 모자라, 젤과 스프레이로 뾰족 세운 펑크족들이 앉아 있었다. 무서웠지만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혼돈과 자유의 세계라는 느낌이 딱 왔다. 영화 ‘아가씨’의 대사처럼 ‘내 인생을 파괴하러 온 구원자’들이 가득했다.

그날 처음으로 크라잉넛의 공연을 봤다. ‘말 달리자’를 들었다. 이십대 초반의 애호가였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시나위의 명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가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을 때, 바로 이랬겠구나 싶었다.

드럭은 1994년 여름, 문을 열었다. 펑크와 그런지를 주로 틀어주는 음악 술집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의 홍대 앞, 1960~70년대 록을 주로 틀어 주던 신촌 음악 술집들과는 차별화한 가게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주로 동시대 음악을 틀거나 레게, 데스메탈, 모던 록 등 특정 장르만을 틀어주는 가게였다. 당연히 해당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게를 찾았다.

드럭은 펑크와 그런지를 좋아하는 이들의 아지트였다. ‘죽돌이’끼리 만든 1995년 4월 5일, 커트 코베인 1주기 추모 공연은 홍대 앞에 새로운 문화, 즉 인디가 탄생하는 잉태의 순간이었다. 헤비메탈과 하드 록 일색이었던 당시의 록 공연에 질렸던 새로운 세대의 애호가들로 주말마다 드럭은 가득 찼다. 펑크, 그런지를 하려는 새로운 밴드들이 드럭을 찾아 무대에 섰다.

멤버들이 갓 스무 살이었던 크라잉넛 또한 그중 하나였다. 순식간에 드럭을 대표하는 밴드가 됐다. 연주는 누구보다 엉망이었고 처음에는 정해진 포지션도 없이 멤버들이 파트를 바꿔가며 놀았다. 그런데도 삽시간에 크라잉넛이 드럭의 인기 밴드, 나아가 홍대 앞 입소문의 중심이 됐던 힘은 실력 이상의 에너지였다. 그들에겐 어떠한 관습과 규칙, 선입견도 없었다. 그저 기타를 들고 드럼을 치면 그것이 곧 음악이라는 것을 설파하는 듯했다. 펑크의 신이 이 땅에 내려보낸 DIY(Do It Yourself·스스로 하라) 정신의 현현처럼 보였다.

1990년대 홍대 앞의 공기 그 자체였다. ‘말 달리자’도 그렇게 탄생한 노래다. 드럭 사장과 대판 싸운 후, 이상혁(드럼)이 홧김에 만든 이 노래는 1996년 여름 크라잉넛과 옐로우키친의 조인트 앨범 ‘아워 네이션’으로 첫선을 보였다. ‘말 달리자’는 드럭의 송가에서 홍대 앞 인디 신의 상징이 됐고, 1998년 데뷔 앨범에 재녹음돼 발표된 후에는 전국 노래방의 엔딩 곡이 됐다. ‘말 달리자’로 대표되는 초기의 크라잉넛이 청년의 분노와 위악을 상징했다면, ‘베스트 앨범’의 첫 곡이자 2집을 대표하는 곡인 ‘서커스 매직 유랑단’은 그들의 해학을 드러내는 노래다.

1998년 늦은 봄의 주말, 공연이 시작되기 전 드럭 계단에 앉아서 한경록(베이스)이 기타를 치며 종이에 가사를 끄적거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가사와 코드는 머지않아 드럭 공연에서 노래가 돼 등장했다. 매주 공연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행사를 뛰던 자신들을 유랑단에 비교한 이 노래는 2집의 타이틀 곡이자 지금까지도 공연의 오프닝 곡으로 가장 자주 쓰이는 노래다. ‘베스트 앨범’에도 첫 곡으로 수록됐다. 크라잉넛을 펑크 밴드에서 밴드로 확장한 노래는 3집 ‘하수연가’에 담긴 ‘밤이 깊었네’다. 이 노래는 그들을 분노의 질풍가도에서 풍류의 오솔길로 이끌었다. ‘말 달리자’가 노래방과 스쿨 밴드를 통해 전파됐다면 ‘밤이 깊었네’는 라디오 PD들이 사랑한 노래였다.

그해 명절이 지난 후 홍대 앞 사람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시골 갔더니 우리 삼촌이 고스톱 치면서 ‘밤이 깊었네’를 흥얼거리더라”라는 말을 듣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크라잉넛이 전국구가 됐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밤이 깊었네’에 이어 ‘명동 콜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풍류는 그들이 지금껏 음악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영원히 분노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크라잉넛의 주요 앨범들. 사진 드럭 레코드
크라잉넛의 주요 앨범들. 사진 드럭 레코드

데뷔 이후 홍대 떠나지 않은 크라잉넛

크라잉넛이 25년간 쌓아온 업적 중 하나는 데뷔 이후 지금껏 홍대 앞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스타가 된 이들이 있다. 한참 후에 데뷔해 스타가 된 이들도 있다. 그들 대부분은 스타가 되자마자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볼 수 없었다. 작은 무대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크라잉넛은 늘 홍대 앞에 있다. 전성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첫 방송 출연이었던 1998년 8월 15일 MBC ‘생방송 음악캠프’ 출연을 마치고 나서도 바로 드럭으로 달려가 평소처럼 공연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정기적으로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개최했던 ‘너트 쇼’를 통해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등이 더 많은 팬을 만날 수 있었다. 멤버 한경록의 생일이자 ‘홍대 앞 3대 명절’로 불릴 만큼 거대한 잔치인 이른바 ‘경록절’에는 많은 신인 밴드가 무대에 올라 새로운 팬을 만든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홍대 앞이 대체 불가능한 음악의 중심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는, 크라잉넛 같은 존재가 장승처럼 그곳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홍대 앞의 과거이자 현재 그 자체인 존재다.

25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홍대 앞을 찾았다. 신기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동경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주말이 되면 홍대 앞에 갈 생각에 설렜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 이들이 있었다.

크라잉넛의 ‘베스트 앨범’은, 그들 모두에게 바치는 잊고 있던 적금 통장과 같다. 그때 그곳에 있었기에 가입할 수 있던, 은밀한 적금의 만기 알림이 울린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