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페이스풀’은 한 아내의 외도와 일탈의 심리 표현이 탁월한 로맨스 스릴러 영화다. 사진 IMDB
‘언페이스풀’은 한 아내의 외도와 일탈의 심리 표현이 탁월한 로맨스 스릴러 영화다. 사진 IMDB

저렇게 아름다운 집에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전원주택의 전경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출근하는 남편과 등교하는 아이의 뒷바라지로 분주한 아침을 보낸 코니는 여덟 살 아들의 생일선물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지독한 돌풍을 만난다. 머리카락을 흩어놓고 옷자락을 풀어 헤치고 스커트를 뒤집으며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바람. 그녀는 이리저리 바람에 떠밀리다가 운명처럼 한 남자와 부딪혀 넘어진다.

택시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니는 무릎에 난 상처를 치료해주겠다는 젊고 잘생긴 남자를 따라 그의 아파트에 들어간다. 타인의 친절에 대한 호감, 외간 남자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일탈에 대한 욕망이 깨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코니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피를 씻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나왔을 뿐이었다.

살다 보면 문득, 인생을 뒤집어 놓을 정도의 강풍을 한두 번은 경험한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지라도 평탄하기만 한 인생은 허락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그 회오리가 교통사고나 가족의 암 선고일 수 있다. 파산일 수도, 실직일 수도 있다. 부러울 것 없이 완전해 보이는 부부라면, 외도라는 형태로 뜻밖의 고비가 찾아오기도 한다.

코니는 남자가 선물해준 책 속에서 연락처를 보게 되고 자석에 끌리듯 시내로 나가 공중전화기를 집어 든다. 일상과 일탈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아직은 꺼려지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달리, 잠시 들러 커피 한잔하고 가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기쁘기만 하다.

10년 넘는 결혼생활, 남편의 손길에 떨림을 느껴본 게 언제였을까.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는 시간이란 수레바퀴에 마모되어 서로에게 덤덤해졌다. 그런데 코트를 벗겨주는 낯선 남자의 손길만으로도 그녀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걸 느낀다.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도 설렜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이 남자도 권태로워지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낯선 남자의 숨결과 아직 탐험되지 않은 미지의 육체 앞에서 코니는 자각한다. ‘내가 아직 여자였구나, 아내도 엄마도 아닌, 내 안의 여자가 아직 살아 있었구나.’

소금물을 들이킨 것처럼 코니는 남자를 갈망한다. 달려가 안기고 싶고 더 강렬한 전율을 느끼고 싶은 욕망으로 몸이 달아오른다. 그러는 사이 가스 불 위의 냄비는 끓어 넘치고 프라이팬의 고기는 타기 일쑤다.

허술해지는 집안일, 남편에게 하는 거짓말도 모자라 아들에게까지 소홀해지는 자신이 혐오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없는 생활로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현실은 삭막해진다.

“날 사랑해?” 아내의 변화를 모를 리 없는 남편이 묻는다. 만족한 답을 주지 못하는 아내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남편은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사람을 시켜 아내의 수상한 행적을 모두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쌓아 올린 결혼생활인가. 가정을 지키려고 밤낮없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던가. 아내를 얼마나 믿고 사랑했던가. 남편은 배신감에 몸을 떤다.

외도가 드러나면 당사자들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은 외도를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잠깐의 소용돌이는 삶의 터전을 휩쓸어버릴 수도 있다. 아내를 빼앗아간 놈은 어떤 녀석일까. 질투는 폭력이나 살인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을 간과한 채 남편은 그의 아파트로 찾아간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만나서 뭘 했는지, 남편은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다. 그리고 아내와 젊은 남자가 뒹굴었을 흐트러진 침대, 그 머리맡에 자신이 아내에게 주었던 특별한 선물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성을 잃는다. 그는 충동적으로 연적을 살해한다.

외도는 들키기 전까지만 달콤하다. 바람은 배우자가 알지 못할 때만 짜릿하다. 아무도 모르고 끝나면 다행이지만, 육체의 유혹은 언제나 이성보다 강렬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끝낼 수 있겠지,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중생활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다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배우자가 눈감아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과 아내의 입장이 바뀌어도, 연인이 뒤늦게 만난 천생연분이라 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결혼이란 울타리에 들어온 이상, 외도가 불러올 상처와 대가는 상상했던 것보다 모질다.

죽은 남자를 아느냐고, 경찰이 그들을 찾아오고서야 코니는 남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는다. 너무나 큰 혼란과 충격 속에서 서로의 죄를 인정한 부부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함께 일구어낸 가정이 얼마나 소중했었는지 깨닫는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그 모든 걸 무너뜨린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바람이 불던 그날, 남자를 따라가는 대신 택시를 탔더라면! 그 순간의 선택이 모든 걸 바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코니는 평온하게 잠든 아들을 보며 세상에서 멀리 떠나 숨어 살자고 말한다. 남편도 그러자고 답한다.

하지만 그들이 탄 자동차는 파란 불이 켜졌는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이 떠나지 못하는 사이, 신호등은 노란불에서 다시 빨간불로 바뀐다.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행복하면 정말 안 되는 걸까, 갈등을 경험하는 관객은 마지막 장면을 쉽게 잊지 못한다.

‘위험한 정사’ ‘나인 하프 위크’ ‘은밀한 유혹’ 등 여성의 심리 표현에 탁월한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2002년도 작품이다. 남편은 리처드 기어가, 아내는 아름다움과 섬세한 연기로 찬사받은 다이안 레인이 맡았다.

행복은 눈부시고 화려하고 짜릿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셔츠를 뒤집어 입고 나와 투덜거리는 남편을 달래 출근시키는 일. 도시락과 모자를 챙겨 아이를 등교시키는 정신없는 아침.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고 가족의 생일선물을 사고 저녁거리를 장봐야 하는 성가신 하루. 엄마, 아빠를 불러대는 아이들의 성화에 포기해야 하는 로맨틱한 밤들. 그런 소소하고 보잘것없는 매일매일의 아수라장. 그래서 잃어버리기 전에는 공허하고 하찮고 남루하게만 느껴지는 일상들. 놓치고 난 뒤에야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행복이란 그토록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었음을.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