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1986년 이후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의 오페라 화제작 의상을 맡은 크리스티앙 라크루아. 발렌티노가 만든 라 스칼라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비올레타의 의상. 2019년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개관 150주년 기념으로 일본 여성 패션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가 만든 오페라 ‘올랜도’ 의상. 사진 컬처 앰버시·발렌티노 가라바니·미하엘 포에흔
왼쪽부터 1986년 이후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의 오페라 화제작 의상을 맡은 크리스티앙 라크루아. 발렌티노가 만든 라 스칼라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비올레타의 의상. 2019년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개관 150주년 기념으로 일본 여성 패션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가 만든 오페라 ‘올랜도’ 의상. 사진 컬처 앰버시·발렌티노 가라바니·미하엘 포에흔

매년 9월 세계 메이저 오페라 하우스가 새 시즌을 시작한다. 신작 초연이 끝나면 연출가, 가수, 지휘자 이외에 주목받는 크리에이터는 의상 디자이너다. 발레에선 의상을 피부의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오페라에선 연출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무대에서 의상의 중요도는 상당하다.

패션 업계에서도 오페라 하우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디자이너들은 오페라 의상을 만들 때 연출가의 급작스러운 요구에 맞춰 의상을 짧은 시간에 바꾸고도 품질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패션 산업에선 이런 노하우를 자사의 기성복 컬렉션에 접목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효과적이다. ‘자라(ZARA)’ 등 패스트패션의 고급화를 추구하는 브랜드에선 전막 오페라 관람 관객을 타깃으로 이브닝 드레스를 내놓기도 했다. 패션 디자이너에게 오페라 하우스는 망중한을 즐기는 휴식처이자 영감을 얻는 원천이다. 봄가을로 나뉘는 패션 스케줄에서 떨어져서 오페라 의상 제작이 이뤄지고, 극장 위 캐릭터의 움직임을 고민했다가 다음 컬렉션에 반영하는 이점이 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런던의 ‘로열 오페라’, 파리의 ‘파리 오페라’, 뉴욕의 ‘메트’ 등 패션을 선도하는 도시의 오페라하우스는 장 폴 고티에, 미우치아 프라다 같은 노장(老將)부터 벨기에의 중견 디자이너 팀 반 스틴베르겐까지 명성 있는 예술가를 포용했다. 프라다는 2010년 메트에서 ‘아틸라’, 장 폴 고티에는 2012년 몽펠리에 오페라에서 ‘피가로의 결혼’, 팀 반 스틴베르겐은 2010년 라 스칼라에서 ‘라인의 황금’ 의상을 맡았다.

역사적으로 패션과 오페라가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양대 오페라 하우스는 라 스칼라와 파리 오페라다. 라 스칼라는 아르마니, 펜디, 로메오 질리, 안토니오 마라스, 미소니, 발렌티노와 협업했고, 펜디 시절 오페라 의상 디자인에 머물던 카를 라거펠트는 샤넬 시대엔 갈라 무대 디자인까지 책임졌다. 이탈리아 셀럽 디자이너에게 라 스칼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의상 제작은 커다란 꿈이다. 2010년대 초 베르사체, 구찌, 페레가 라 스칼라 시절의 칼라스를 오마주한 드레스를 제작해 전시회를 열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디바가 파티에서 입은 드레스가 밀라노 신문에 실리는 자체로 디자이너와 브랜드 가치는 동반 상승한다.

파리 오페라에선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의 활동이 독보적이다. 과거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와 활발히 교류한 지아니 베르사체처럼 라크루아 역시 “극장은 숨 쉴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실제로 2009년 자신의 패션하우스가 파산한 이후 라크루아의 활동은 바르셀로나의 데시구알을 제외하면 파리 오페라가 주축이다. 라크루아는 에콜 드 파리에서 박물관학과 예술사를 이수했고, 바로크 스타일의 오페라, 발레에서 특유의 오리엔탈리즘을 과감하게 구사하면서 연출가와 안무가의 요구를 받아냈다. “쿠튀르의 의상은 멀리 소리 낼 수 없지만 극장의 코스튬은 캐릭터를 살아 숨 쉬게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벨기에 디자이너 팀 반 스틴베르겐은 오페라 ‘라인의 황금’ 의상을 맡으면서 음악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사진 모니카 리터스하우스
벨기에 디자이너 팀 반 스틴베르겐은 오페라 ‘라인의 황금’ 의상을 맡으면서 음악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사진 모니카 리터스하우스
얼마 전 타계한 일본 패션 디자이너 다카다 겐조는 오페라 ‘나비 부인’ 의상 디자인으로 재기를 모색했다. 사진 도쿄 니키카이 오페라 시어터
얼마 전 타계한 일본 패션 디자이너 다카다 겐조는 오페라 ‘나비 부인’ 의상 디자인으로 재기를 모색했다. 사진 도쿄 니키카이 오페라 시어터

현업 복귀했던 겐조, ‘나비 부인’ 의상 직접 제작

10월 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한 일본 패션 디자이너 다카다 겐조에게 오페라 의상 제작을 처음 의뢰한 곳도 파리 오페라다. 1999년 자신의 브랜드 겐조(KENZO)에서 물러난 거장에게 파리 오페라는 로버트 윌슨 연출의 오페라 ‘마술 피리’ 의상을 맡겼다. 겐조는 때 이른 현역 은퇴를 후회하고 복귀를 추진하면서 2010년대 중반 생활 디자인과 오페라 의상 제작에 눈을 돌렸다. 일본인 관점으로 해석한 ‘나비 부인’ 의상을 올해 드레스덴 젬퍼오퍼, 덴마크 왕립 오페라에서 상연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공연이 취소됐다. 겐조는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흥을 발산하는 자유를 처음 허락한 디자이너로 꼽힌다.

사실상 파리에서만 활동한 겐조 이외에 일본에선 모리 하나에, 고시노 준코, 야마모토 요지가 오페라 의상 제작 경험이 있다. 지난 시즌 서구 오페라 시장이 주목한 일본 디자이너는 콤 데 가르송의 레이 가와쿠보다. 빈 국립오페라는 지난해 12월 올가 노이비르트 작곡의 ‘올랜도’ 초연 의상 디자인을 가와쿠보에게 맡겼다. 오페라 하우스 개관 150주년 만에 처음 여성 작곡가를 기용했고 버지니아 울프 원작에 맞춰 의상도 여성이 담당했다. 가와쿠보는 성별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를 표방한 브랜드 가치를 오페라 무대에서 십분 발휘했다.

오페라 등장인물의 강렬한 개성에서 패션 의상의 모티프를 얻는 흐름도 활발하다. 현 버버리 수석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는 2020-2021시즌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개막작인 ‘마리아 칼라스의 일곱 죽음’에서 영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버버리 이미지를 칼라스가 연기한 일곱 개 배역에 투과했다. 2014년 봄 시즌엔 발렌티노 소속의 마리아 그라치아와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가 55개 오페라에서 콘셉트를 취해 55개 룩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