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오른쪽)와 레트 버틀러.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은 러닝 타임이 4시간에 달하는 이 대작에서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쳤다. 사진 IMDB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오른쪽)와 레트 버틀러.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은 러닝 타임이 4시간에 달하는 이 대작에서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쳤다. 사진 IMDB

미국 남부의 조지아주, 타라 농장의 장녀 스칼렛 오하라는 마을 청년들의 선망 대상이지만, 그녀가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은 애슐리 윌키스다. 스칼렛은 그가 멜라니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는다. 아버지 제럴드 오하라는 딸이 더욱 큰 꿈을 가슴에 품기를 바라며 “내가 죽으면 타라는 네 것이다. 땅이야말로 목숨 걸고 지킬 가치가 있다. 영원한 건 땅뿐이란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아가씨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 없다. 파티가 있던 날, 스칼렛은 사람들 눈을 피해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냉정히 거절당한다. 실연의 아픔을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후려치고는 혼자 남아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 모든 장면을 레트 버틀러가 목격한 것을 알게 된다. 레트의 놀림을 받은 스칼렛은 수치심을 느끼며 뛰쳐나간다.

남북전쟁이 터지고 애슐리는 군대 소집이 있기 전 멜라니와 결혼한다. 스칼렛도 홧김에 청혼을 승낙하고, 멜라니의 동생 찰스와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는 입대하자마자 죽고 만다. 스칼렛은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 서글프다. 예쁜 드레스도 못 입고 멋진 모자도 쓸 수 없고 파티에 나가 춤도 출 수 없다니. 검은 상복에 갇힌 채 사람들의 위로와 동정을 받으며 살아야 할 인생이 끔찍하기만 하다. 그녀는 시누이인 멜라니와 함께 애틀랜타에서 지내기로 한다. 휴가 나온 애슐리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스칼렛은 실연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레트를 다시 만나게 된다.

레트는 애슐리와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있는 남자다. 내성적이면서 전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애슐리와 달리 체면과 관습은 집어던지고 새로운 시대에 과감히 도전하는 레트는 전쟁을 이용해 사업 수완을 발휘한다. 신사의 품격을 갖춘 애슐리와 비교하면 경멸받아 마땅한 남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칼렛은 자신을 도발하는 레트가 싫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그가 선물하는 최신 유행 드레스와 보석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몇 주면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4년간 지속하면서 스칼렛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지옥을 경험한다. 패잔병이 되어 돌아오는 군인들, 마취제와 진통제도 없이 팔다리를 절단당해야 하는 부상병들, 끝도 없는 전사자 명단. 그녀는 병사들의 비명과 남편과 자식을 잃은 아내와 부모의 통곡에 귀를 막고 싶다. 스칼렛은 애틀랜타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자 갓 출산한 멜라니와 아기를 데리고 레트의 도움을 받아 타라로 향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착한 고향은 예전의 천국 같은 타라가 아니다. 남군엔 전쟁 물자 명목으로 징발당하고 북군엔 약탈당한 타라에는 목화 한 점, 옥수수 한 톨 남아 있지 않다. 유모가 반겨주긴 하지만 병들어 죽은 어머니와 그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버지, 애슐리가 지켜달라고 부탁한 멜라니와 그들의 아들 그리고 철없는 두 동생까지. 스칼렛은 말 그대로 ‘소녀가장’이 돼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쥔다. “난 절대 지지 않아. 해야 한다면 거짓말과 도둑질, 사기와 살인을 해서라도 다시는 굶지 않겠어. 내 가족을 굶기지 않을 거야.” 응석받이 소녀에서 강인한 여인으로 성장하는 순간이다.

전쟁은 남부의 패배로 끝나고 자유를 얻은 노예는 돈을 주지 않으면 일을 시킬 수 없게 된다. 애슐리가 살아 돌아왔지만 먹여야 할 입이 하나 더 늘었을 뿐. 집안일, 농장 일을 가리지 않으며 억척스럽게 가족을 지켜오던 스칼렛은 집과 농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동생의 약혼자인 사업가 프랭크를 유혹해 결혼한다. 동생의 미움과 세간의 손가락질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을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냈을 때, 프랭크가 흑인들과 얽힌 사건으로 죽는다. 또 한 번 운명의 장난을 깨달은 그녀는 더 이상 남의 아내가 되는 꼴을 보기 싫다며 청혼한 레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하지만 스칼렛은 애슐리를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고 그 사실이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갈라놓는다. 만약 애슐리에게 거절당하는 장면을 레트가 목격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좀 더 일찍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레트를 보면 굴욕의 순간이 자동으로 떠올랐을 스칼렛 입장에서 훼손된 자존심을 살리는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애슐리의 고백을 보란 듯이 받아 내거나 그에 대한 사랑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

따라서 자존심 센 스칼렛이 ‘이젠 당신을 사랑해요’ 하고 레트에게 고백하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녀가 좀 더 성숙해서 그런 집착이 불필요한 것임을 알았다면, 레트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애슐리와 관계를 조롱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해와 서운함이 쌓이면서 두 사람 모두 지쳐갈 즈음, 너무나 사랑하는 딸 보니의 죽음에 깊이 상처 입은 레트는 멜라니가 죽고 애슐리가 혼자 남게 되자 스칼렛에 대한 희망을 접는다. 스칼렛이 뒤늦게 진실한 사랑을 꺼내 보이지만 레트는 냉정히 떠난다.

절망에 빠져 울던 스칼렛은 오래전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영원한 건 땅뿐이란다.” 그녀는 비로소 그 무엇보다 타라를 사랑했다는 걸, 타라를 의지했다는 걸 깨닫는다. 마침내 스칼렛은 타라, 그 넓고 단단한 대지에 서서 레트의 사랑을 되찾을 길을, 또 다른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첫 흑인 아카데미상 배출한 명작

1939년에 ‘오즈의 마법사’를 발표한 빅터 플레밍 감독이 같은 해 12월에 내놓은 작품이다. 러닝 타임이 4시간 가까이 되지만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이 연기하는 스칼렛과 레트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깝지 않은 명작이다.

마거릿 미첼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큼 남북전쟁을 오직 남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 결과 인종 차별을 미화했다는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오하라 집안의 큰 기둥이고 스칼렛에겐 엄마보다 가까웠던 유모를 연기한 해티 맥대니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흑인이 조금도 존중받지 못하던 시절, 그녀는 아카데미 역사상 시상식에 참석한 첫 흑인이었고 첫 흑인 후보자였으며 첫 수상자였다.

모든 예술은 시대와 사회를 담아낸다. 작품을 통해 당대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영화와 소설의 매력이다. 그런데 현대의 잣대에 맞지 않는다고 과거의 작품들을 시대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게 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스칼렛 시대의 사람들처럼 대농지를 소유하지는 못해도,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이곳만이 전부일 뿐인 현대의 보통 사람들에게도 저마다 타라는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힘들 때, 지칠 때, 울고 싶을 때 그래서 희망을 찾고 싶을 때 찾아보는 명작이 그들만의 타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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