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축구 골키퍼였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키커가 찬 공이 골문을 뚫었는지 뚫지 못했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끝나 버린다. 이게 뭐야. 진짜 이렇게 끝난다고? 스포츠 중계였다면 집단 항의가 빗발치고도 남을 법한 상황이지만, 다행히 이것은 소설의 엔딩이고 엔딩에 이를 때까지 이어지던 매우 곤란한 싸움을 떠올리면 이렇게 끝나는 것만 해도 작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을 지경이다.

지난한 싸움이란 이런 것이다. 골키퍼와 키커가 서로를 앞에 두고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때 수 싸움이라는 게 묘해서 조금 더 생각한다고 조금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하는 건 아니지만, 꼬리를 물리면 잡히는 게임처럼 잡히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는 식이다.

예컨대 골키퍼가 키커를 잘 안다고 치자. 골키퍼는 키커가 어느 방향으로 공을 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키커 역시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골키퍼는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할 테고 그 결과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소설이 어느 쪽으로도 손들어 주지 않고 끝나는 건 승부를 맺지 못한 미완의 결론이라 부를 만하지만 이러한 결론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미완의 결론이 아니라 미완이 곧 결론이다.

두 사람의 수 싸움에 승자가 있을까. 있다면 그 승리는 인과관계에 따른 결과일까. 경우의 수를 예측하는 데 집착하는 행위는 전략이 아니라 강박이다. 골문은 너무 넓고 키커가 어느 쪽으로 달려올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는 것과 똑같다.” 어쩌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키커의 방향을 예측하려 하지만, 한 줄기 지푸라기로는 문을 막을 수 없다. 종종 잊어버리지만, 페널티킥은 승부가 아니라 벌칙이지 않은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막기 위해 서 있으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한다. 압도적 불안이 소설의 엔딩을 감싼다.

강박은 불안에서 기인하고 불안은 강박을 동반한다. 불안과 강박의 주인이자 소설의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 블로흐는 전직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a하고 있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출근한 어느 날 아침, 현장 감독과 눈이 마주친 그는 그의 눈빛을 해고의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난다. 정말 눈치일 수도 있고 지레 겁먹고 오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블로흐는 일자리를 잃고 불안과 좌절, 절망을 품은 채 극장과 시장과 뒷골목을 배회한다. 그러던 중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는 여성과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데, 다음 날 아침 여자와 대화하던 중 그녀를 목 졸라 죽인다. 도대체 왜?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고작해야 이것이 전부였다.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

골키퍼와 키커가 서로 행동을 예측하려고 수 싸움을 벌이는 과정이나 현장 감독의 눈빛에서 해고의 의미를 읽어 내는 일, 또는 일하러 가지 않느냐는 여자의 말에서 모욕감을 느끼고 상대의 목을 조르는 행위는 그와 상대방의 소통에 심각한 어긋남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자신을 향한 행동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는 그는 망상에 빠진 범죄자일까. 상대방의 눈빛이나 특별할 것도 없는 말에서 치명적인 모멸감을 느끼는 그가 앞서 생각하는 사람인 건 틀림없다.

그러나 키커가 어느 쪽으로 공을 찰지 미리 생각해 본다고 한들 실제 방향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서 생각하는 그의 선택 역시 상대방의 실제 의사와 일치할 수 없다. 심각한 불일치로 그는 구토감을 느끼지만, 불일치는 그에게 모종의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구토감은 불일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자각이기 때문이다.

약속된 의미로서의 언어를 거부하는 그는 지도에서 사각형을 보고 그것을 실제 주변에서 발견하지 못할 때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곳에 있어야 할 집이 없거나 이 자리에 곡선을 이루고 있어야 할 도로가 실제로는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경우에 편안함을 느낀다. 언어와 실재가 불일치할 때 그는 안도감을 느낀다. 골키퍼와 키커가 주고받는 수 싸움으로 이루어진 꼬리잡기 엔딩은 실재를 추측하기 위해 앞서 생각하지만,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실재가 바뀌어 버리면서 생각과 실재가 영원히 일치할 수 없는 불일치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요컨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란 언어가 존재를 예상할 수 없고 존재가 언어를 관통할 수 없는 영원하고 근원적인 불통에서 오는 불안이다. 우리 안에 이미 깊숙하게 자리하는 불안의 원형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게 바로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일 것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른텐 주 그리펜에서 태어났다. 그라츠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4학년 재학 중에 쓴 소설 ‘말벌들’로 1966년에 등단했다. 그해 미국에서 개최된 ‘47그룹’ 회합에 참석해 당시 서독 문단을 주도했던 47그룹의 ‘참여문학’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퍼부은 일화로 유명하다.

그때의 사건으로 이목을 끌게 된 한트케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실험적인 작품 ‘관객모독’ 출간으로 성공을 거두며 명성을 얻는다. 내용보다 서술 자체를 중요시하는 전위적인 작품에 대해 다수의 혹평과 소수의 호평을 받던 그는 1970년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통적인 서사를 회복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집필한 작품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다. 독일어로 쓰인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1972년 빔 벤더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1967년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상을 받았고 희곡 ‘카스파’, 시 ‘내부 세계의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 소설 ‘긴 이별에 대한 짧은 편지’ 등 장르를 넘나드는 왕성한 창작력을 선보였다. 1973년 실러상, 뷔히너상을 받았고 1987년에는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를 썼다.

그의 문학은 자명하게 규정되는 이름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학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며 기존 문학계가 사용하는 언어 방식에 저항했다.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