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잃어버린 사람과 아직은 건강이 남아 있는 사람의 간격,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한 사람과 온종일 보살피면서 몸이 먼저 지쳐가는 사람의 거리.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부부 사이를 죽음은 정말 실금처럼 갈라놓기 시작한다. 휠체어에 탄 아내 안느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르주. 사진 IMDB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과 아직은 건강이 남아 있는 사람의 간격,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한 사람과 온종일 보살피면서 몸이 먼저 지쳐가는 사람의 거리.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부부 사이를 죽음은 정말 실금처럼 갈라놓기 시작한다. 휠체어에 탄 아내 안느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르주. 사진 IMDB

한평생 정 좋게 살아온 노부부 안느와 조르주에게 죽음이 도둑처럼 찾아든다. 안느의 몸에 잠입한 뇌졸중은 수술 후 더 악화해 손과 발을 묶고 언어와 생각까지 훔쳐 간다. 퇴원 후 병원에도 요양원에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자존심 강한 아내를 조르주는 홀로 보살핀다. 그러나 그도 젊지 않아서, 24시간 일으키고 눕히고 먹이고 씻기는 일이 버겁기만 하다. 눈앞에서 차츰 사라져가는 아내의 생명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제자가 다녀간 저녁, 자신에겐 쓸모없어진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던 안느는 그가 떠난 뒤 거실에서 전동휠체어를 미친 듯이 운전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몸짓, 그녀에게 남겨진 자유가 그것뿐이라는 듯. 젊은 시절 사진을 넘겨보던 안느는 무심하게 말한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또한 길기도 하다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아름답고 건강했던 시절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 번은 찾아오는 죽음. 차라리 갑작스러운 죽음이 너그러운 것일까. 느슨하고 게으르게 다가온 죽음은 처음엔 컨트롤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참히 육체를 점령해간다. 아무리 한 몸처럼 살아온 부부라지만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더 못 본 척할 수 없게 되고, 차마 그것까지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더 감출 수 없게 됐을 때, 안타까움은 무뚝뚝함을 가장하고 비참한 마음은 까칠한 독설로 전이되기 일쑤다.

“더 살 이유가 없어. 앞으로 더 나빠질 거야. 왜 내가 우리를 괴롭혀야 해?” 남편의 힘겨움을 모를 리 없는 아내가 말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죽음이 마침표를 찍어주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다르다. 미안해서 짐을 덜어주고 싶은 것과 그래도 옆에 있고 싶은 마음, 내 몸이 편해지고 싶은 것과 숨만 쉬어도 좋으니 오래오래 살아주길 바라는 것은 다른 문제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과 아직은 건강이 남아 있는 사람의 간격,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한 사람과 온종일 보살피면서 몸이 먼저 지쳐가는 사람의 거리.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부부 사이를 죽음은 정말 실금처럼 갈라놓기 시작한다.

안느는 가끔 찾아오는 딸에게조차 무너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식의 생활과 부모의 삶이 분리된 걸 잘 알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딸의 걱정이 조르주에게도 성가시기만 하다.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잔소리하는 딸에게 그는 지친 마음을 터뜨리고 만다. “괜찮은지 본다고 오는 게 짜증스러워. 네가 뭔데 이래? 네가 엄마를 모실래, 요양원으로 보낼래?”

결국, 방문간병인을 고용해 도움을 받지만, 인간적인 것이 사라져버린 인간을 인간적으로 보살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사랑했던 아내를 보살피는 남편의 마음과 직업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손길이 같을 리도 없다. 조르주는 안느를 거칠게 다루는 간병인을 내쫓으며 냉정하게 말한다. “언젠가 네가 네 환자한테 한 거랑 똑같은 취급을 받아도 너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날이 올 거야.”

죽음은 왜 탄생처럼 기쁨과 축복으로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아기의 옹알이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하고, 첫걸음마처럼 뒤뚱거리는데도 왜 잘한다, 대견하다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와 눈 맞추고 손잡고 웃음 짓게 하는 생명과 달리 왜 죽음은 모두를 멀어지게 한 뒤 홀로 남아 외로워야 하는 걸까. 가족에게 희망과 행복을 선물하며 태어났던 것과 달리 왜 주변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하며 떠나야 하는 것일까. 부부 사이에 똬리를 틀고 앉은 죽음을, 반갑지도 않고 환영할 수도 없는 인생의 끝자락을, 그렇게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삶의 마지막을 노부부는 함께 견딘다.

영화는 꽉 잠긴 아파트를 사람들이 강제로 열고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으로 들어간 형사는 악취를 못 참고 코를 막은 채 창문을 열어젖힌다. 침실에는 안느가 단정한 모습으로 마른 꽃 무덤 위에 자는 듯 누워 있다. 조르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된 것일까. 어디로 간 것일까.

전쟁을 같이 겪은 전우처럼 인생의 굽이를 함께 넘어온 노부부의 뒷모습만큼 아름다운 풍경도 없다고 한다. 두 손 꼭 맞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은발의 남편과 아내, 병든 아내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앙상한 남편, 허리 굽은 남편이 넘어지진 않을까, 멀찍이 따라가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늙은 아내. 두 사람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바다가 생기기 전, 바위가 모래로 부서지기 전부터 시작됐다 해도 곧 닥쳐올 인생의 이별을 막을 수는 없다. 혼자 남겨두고 먼저 떠나는 쪽은 누구일까. 혼자 남아 홀로 떠나야 하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그래서 그들은 소망한다. 한날한시에 같이 떠날 수 있기를.


죽을힘을 다해 죽음에 맞서야

죽음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답답하고 무겁기만 한 영화다. 그러나 몇 년 후 닥칠 부모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니, 고령화 시대,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언젠가는 노년 장애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만 알아도 차마 고개 돌려 외면하기 힘들다. 더 내 몸을 어찌할 수 없을 때, 자식이 있어도 주변의 도움이 있어도 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프랑스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무르(Amour)’는 억압과 강제가 얼마나 끔찍한 괴물을 낳는가를 소름 끼치게 그려냈던 ‘하얀 리본’의 감독 미카엘 하네케가 삶과 죽음을 한 꼬챙이에 꿰어 관통시킨 작품이다. 프랑스 고전 영화 ‘남과 여’의 장 루이 트린티냥과 ‘내 사랑 히로시마’의 엠마누엘 리바가 80대 노부부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러나 절박하게 그려낸다. 이자벨 위페르가 무기력하게 부모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모든 자식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냈다.

겉모양도, 살아가는 모습도 제각각 다르지만 모든 생명의 종착역은 똑같이 한곳, 죽음이다. 이후의 세상이 있든 없든, 꽃길이든 가시밭길이든 그곳으로 데려다주는 죽음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고통스럽고 외롭다. 그러니 무겁게만 보이는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포기하고 항복하라는 것일 리 없다. 오히려 감독은 묻고 있는 게 아닐까. 나 홀로 고독사든, 노부부의 힘겨운 마지막 동행이든 다를 게 뭐 있느냐고. 미리 걱정하고 두려워한다고 죽음이 오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자유로울 때 신나게 살아가라고.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이 쳐들어오면 죽을힘을 다해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것, 그것 또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삶이 아니겠느냐고.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