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은 잔잔하고 섬세한 플루트 선율과 함께 막이 오르는 희곡이다. 플루트 선율은 이렇게 묘사된다. “풀밭과 나무와 지평선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말로 시작하는 ‘설국’만큼이나 고요하고 서정적인 시작이지만 끝내 이르게 되는 파국에 비추어 보건대 풀밭과 나무 그리고 지평선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자연이라기보다 무심하고 냉정한 자연처럼 보인다.

무심한 자연의 법칙 하나. 인간은 늙는다. 냉정한 자연의 법칙 둘. 늙은 인간도 계속해서 일하고 싶어 한다. 피곤해 죽을 지경이어도 인간에게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의 주인공 윌리 로먼은 한때 누구 못지않게 잘나가는 세일즈맨이었으나 지금은 매주 먼 길을 달려 외근을 다니지만 빈손으로 갔다 빈손으로 오기 일쑤인 한물간 예순세 살의 세일즈맨으로 해고 위기에 처해 있다. 자신만만했던 지난날은 거짓말처럼 다 사라졌고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더는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도무지 자신의 기대를 채워 주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자식놈뿐이다.

요즘 윌리 로먼에게는 조금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그가 운전하는 차가 자꾸 길가로 빠지는 것이다. 얼마 전 외근 길에는 새삼스럽게 창밖의 풍경이 다 보였다. 매주 오가는 길이지만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는 또 처음이었다. “나무는 무성하고 태양은 따뜻하고. 나는 앞창을 열고 따뜻한 바람에 내 온몸을 맡겼지. 그런데 갑자기 길가로 빠지고 있는 거야! 운전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거였지.” 그는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과거에는 외근 가는 길이 이토록 아스라하지 않았다. 그때는 도착해야 할 곳이 있었고 도착하면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 사람에게 팔아야 할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기어이 다 팔아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도착할 곳이 없고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으며 팔아야 할 것도 없다. 다 팔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는 건 물론이다. 사실 가진 건 전부 다 팔았다. 솔드 아웃. 언젠가 작가인 아서 밀러는 윌리 로먼이 판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청중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팔았습니다.”

이 희곡을 읽는 동안에는 유독 내 가족과 나 자신을 많이 떠올렸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자신을 파는 세일즈맨이다. 화물에 짐을 싣고 나르는 나의 아버지도 세일즈맨이고, 제약회사에서 약을 판매하는 나의 동생도 세일즈맨이다. 기사를 써서 사람의 관심을 사는 일도, 출판사 편집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일도 세일즈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세일즈맨은 아니지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모두 세일즈맨이다. 돌아보면 이러한 자기 영업의 역사는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나를 판매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착취하는 자기 파괴의 시간이 파괴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나 자신을 구성하는 삶의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이런 현실이 괴롭기보다 더 이상 나를 팔 수 없는 시간이 올까 봐 두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 시간을 가능한 한 늦추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이 꼭 윌리 로먼 같아서 안쓰러울 때도 있고 그 시점에서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 괴로울 때도 있다. 그러나 출구는 없다. 우리는 세일즈맨의 후예다.


기어이 자기 죽음을 판매한 세일즈맨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윌리 로먼의 인생이 진짜 끝나는 것까지를 다루는 이 소설은 신문 지면의 사건사고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선택으로 끝을 맺는다. “상대를 받을 때는 낮고 세게 받아버려야 해.” 몰락하고 타락한 인생을 사는 아들의 마지막 재기를 도와주기 위해 돈을 장만하고 싶어 하는 윌리 로먼은 자동차 사고 속에 자신을 밀어 넣어 보험금을 받아 내고자 한다. 그가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도와주고자 하는 아들은 평생 윌리 로먼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하며 살아왔다. 얼마 전에는 도벽으로 인해 감방에 들어갔다 나오기까지 했다.

그런 아들에게 그는 세상을 들이받을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단단히 알려주며 정작 그 자신이 세상을 들이받는다. 그가 낮고 세게 들이받은 상대는 누구일까. 젊은 시절 그가 판 것을 사 갔으나 이제는 팔 게 없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일까. 그는 이토록 이해타산적인 세상에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넘긴다. 마지막으로 그가 판 것은 자신의 목숨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평생의 세일즈 경력으로 기어이 자기 죽음을 판매한 세일즈맨의 최후!

일찍이 윌리 로먼(low man)은 낮은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에는 운명처럼 숙명처럼 ‘낮음’이 각인돼 있다. 이 ‘낮은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이 낮고 세게 들이받아야 한다는 말이라는 사실은 너무 슬프다. 낮은 사람으로 태어나 낮은 사람으로 자멸한 이 서글픈 엔딩을 나는 로먼의 플루트라 부르고 싶다. 저음역, 중음역, 고음역으로 나뉜 플루트의 음역 중 고음역은 특별히 소리를 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올라가고 싶었으나 끝내 자신의 음역을 벗어나지 못한 로먼의 인생은 일생일대 높은 곳을 지향했으나 낮은 곳에서 시작해 낮은 곳에서 끝났다. 잔잔하고 섬세한 플루트 선율과 함께 막이 올랐던 이야기는 음을 이탈하는 로먼의 비극으로 끝난다. 그가 남긴 돈으로 아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가 판 목숨의 대가는 무엇일까. 우리가 팔아 온 것을 새삼 돌아볼 수 있는 엔딩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아서 밀러(Arther Miller)

1915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빵집 배달원, 자동차 부품 회사 점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미시간 대학에 재학하면서 극작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뉴욕 연방 연극 프로젝트에 참여해 라디오극과 드라마 대본을 집필했다. 194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모든 행운을 가졌던 남자’가 평단의 호평에도 공연 나흘 만에 막을 내렸으나, 1947년 발표한 ‘모두가 나의 아들’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49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입센의 작품을 각색한 ‘인민의 적’, 세일럼 마녀재판을 소재로 한 ‘시련’은 당시 미국의 공산주의자 고발 운동인 매카시즘 열풍에 대한 첨예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며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 때문에 반미 지식인으로 몰려 법정에 서기도 했다. 1956년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와 결혼, 1961년에 이혼한 후 이듬해 오스트리아 출신 사진작가 잉게 모라스와 재혼했다. 1964년 ‘타락 이후’와 ‘비시에서 생긴 일’을 발표하고 1983년 베이징 인민 극장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출했으며 자서전 ‘시간의 굴곡’을 출간하는 등 말년까지 집필과 연극 관련 활동을 쉬지 않았다. 2005년 코네티컷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