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결말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죽었다’니. 더 이상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없으므로 닫힌 결말이라는 표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다. 이것은 체호프 단편소설 ‘관리의 죽음’을 장식하는 마지막 문장이다. 주인공 체르뱌코프는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지도 않은 채 소파에 드러눕는데, 이어지는 다음 장면이 바로 죽었다는 소식이다. 지금도 ‘관리의 죽음’을 처음 읽었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얼마나 놀랐던지, 나는 내가 방금 본 것을 믿을 수 없어 읽은 문장을 또 읽고 읽은 페이지를 또 읽으며 놓친 문장을 찾아 헤맸다. 그런 건 없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죽음을 암시하는 문장 같은 것 말이다. 그저 죽음이 왔을 뿐이다.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죽음이 이렇게 갑작스러워도 되는 걸까. 결말이 이렇게 느닷없어도 되는 걸까. 한 편의 콩트 같다고 생각하며 이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을 책꽂이 안쪽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체호프를 읽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해도, 혹은 ‘작은 인간’을 발명한 위대한 작가라고 해도, 그의 작품에 스며든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설정을 나는 다소 얕잡아 봤던 것 같다.

뭐, 그렇지 않겠나. 소설의 내용을 알게 되면 독자 여러분도 이런 내 태도를 조금은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 남성이 있다. 그의 이름은 체르뱌코프. 직업은 회계원이다. 그가 어느 멋진 저녁에 오페라를 보다가 재채기를 한다. 예절 바른 우리의 주인공 체르뱌코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다음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침 그의 시야로 한 남성이 들어온다. 남성은 자신의 대머리와 목을 장갑으로 열심히 닦으며 투덜거리고 있다. 마치 체르뱌코프의 침이 튀기라도 한 것처럼.

체르뱌코프는 그가 운수성 장군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바로 사과를 시도하는 체르뱌코프를 향해 장군은 괜찮다고, 앉아서 공연이나 보라고 하지만 그것을 더 화가 났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체르뱌코프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사과를 계속해서 시도한다. 급기야 직접 찾아가서 사과하고 그게 잘 안 먹히는 것 같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성질을 낸 다음에, 그럼 편지를 한번 써 볼까? 마음먹은 다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 다시 또 장군의 집에 찾아가더니 결국에는 꺼지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우리의 주인공. 미련하고 안쓰러운 체르뱌코프. 쫓겨난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눕더니, 그대로 죽어 버린다. 아니 이게 죽을 일이야? 문학 작품에서 죽음을 이렇게 남용해도 되는 거야? 내게 이 ‘묻지 마 죽음’은 너무 비현실적인 엔딩처럼 보였다. 농담하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아무 준비도 안 됐는데 불쑥 튀어나와 넘어지고 주저앉게 만드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짐작하기 전의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주눅이 든 채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누워 본 적이 있다. 내일이 오는 게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답도 없는 말만 하염없이 반복하며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때가 있지 않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기어이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그에 맞춰 세상의 온갖 불안과 공포를 다 내 것으로 만드는 성격 탓일 테다. 그러다 보니 습관성 망상도 잦다. 일말의 단서만 있으면 그 단서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불행을 예상할 수 있다. 더 실망하거나 좌절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자기방어일 테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괜찮을 때조차 정말로 괜찮지 않은 게 아닐까, 내가 안쓰러워질 때가 있다.

나의 적은 나라는 말. 이럴 때 보면 더할 수 없이 정확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는 나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다. 내가 어떤 도전을 앞두고 있을 때 내 안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 될 거야. 잘할 수 없을 거야. 상처받으면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몰라.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내가 나를 너무 많이 알아서 그런 거다. 나를 방해하는 것은 나, 나를 붙잡는 것도 나, 나를 죽이는 것도 나. 체르뱌코프의 죽음은 자신을 너무 많이 알아서 자신을 너무 강하게 방어하려는 나머지 짓지 않은 죄의식을 느끼고 받지 않을 미움을 받고 듣지 않아도 될 지탄을 받으며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소설에는 ‘어느 날 갑자기’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그것도 첫 페이지에서. 엔딩에 이르면 이 느닷없는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라는 말과 조응(照應)하며 인생은 결코 노크하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정말 그런 걸까. 이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 갑작스러운 죽음에 불과한 걸까. 소설의 주인공이 체르뱌코프라면 소설의 반동인물(反動人物·이야기에서 주인공과 대립해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도 체르뱌코프다. 대머리 장군이 아니라 체르뱌코프 자신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내야만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체르뱌코프, 그러니까 이 ‘작은 인간’의 작은 마음이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를 내쫓아 버린 가장 강력한 적인 셈이다. 하여 나는 이 죽음을 가리켜 타살이라고도 자살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형국에 이르러 버렸다. 소파 위에서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을 후회하고 걱정하는 데에 쓰고 있는 죽음의 마음만이 덩그러니 남아 스스로 소외돼 버린 나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1860년 러시아 항구 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던 아버지의 파산으로 일가족이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하게 됐지만 체호프는 고향에 남아 고학으로 김나지야(한국의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1879년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했고, 1882년부터 5년에 걸쳐 유머 주간지 ‘오스콜키’에 300여 편의 소품을 기고했다. 1884년에 의사로 개업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접어들었으며 검열과 잡지사의 무리한 요구 등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죽음’ ‘카멜레온’ ‘하사관 프리시베예프’ ‘슬픔’ ‘거울’ 등과 같은 풍자와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겼다. 1886년 두 번째 객혈과 1888년 소설가 가르신의 자살 등으로 건강이 악화했음에도 불구하고 1890년 사할린으로 자료 수집 여행을 떠났고 이태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창작을 계속함으로써 원숙기를 맞이했다. 1899년에 결핵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갈 때까지 소설 ‘결투’ ‘귀여운 여인’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골짜기에서’ 등과 그의 4대 희곡 중 첫 작품 ‘갈매기’를 발표했고 이어서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등을 집필했다. 1904년 44세의 나이에 병세 악화로 “나는 죽는다(Ich sterbe)”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