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세상영농조합이 빚은 증류주 ‘소호’(왼쪽에서 첫 번째), 미국인이 만든 소주 ‘토끼’(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이미혜
밝은세상영농조합이 빚은 증류주 ‘소호’(왼쪽에서 첫 번째), 미국인이 만든 소주 ‘토끼’(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이미혜

서늘한 바람이 불면 술이 당기기 마련이다. 산과 들이 단풍으로 물드는 중양절(음력 9월 9일)에는 단풍나무 아래서 마시는 은은한 국화주가 제격이다. 이날은 국화 구경을 하며 국화전을 먹고 국화주를 마시기 적당하다. 양력으로 10월 7일이 중양절이었다. 예로부터 국화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을 뜻하는 영초(靈草·약재로서 뛰어난 효과가 있는 풀)로 여겨졌다.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시면 눈과 귀가 밝아지고 장수를 누린다는 전설이 있다. 국화에 생지황, 구기자, 당귀 등을 넣고 찹쌀로 빚은 국화주는 많이 마셔도 다음 날 머리가 맑다. 계절의 정취와 국화 향기에 취해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낙엽이 지고 가을은 깊어간다.

술에 얽힌 이야기들은 전통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제일 흥미로운 이야기는 새해 첫날에 마시는 술, 도소주(屠蘇酒)에 대한 내용이다. 도소주는 ‘액운을 물리치는 술’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도소주는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인 섣달그믐날 밤에 우물에 담가두었던 약재를 청주에 넣고 끓여 정월 초하루 아침에 온 가족이 함께 마셨던 술이다. 앞으로 1년을 잘 보내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던 셈이다. 특이하게 동쪽을 향해 앉아 한 사람이 한 잔씩 마시는데 나이가 적은 아이부터 마시기 시작해 나이가 많은 사람 순서로 마셨다고 전해진다.

세시풍속(歲時風俗)에 따라 옛사람들이 마시던 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시주(歲時酒·계절 변화에 따른 명절이나 세시풍속에 맞춰 빚는 술)에 대해 알아갈수록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싶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풍부하다.

먼저 봄에 마시는 세시주부터 살펴보자. 옛사람들은 강남 갔던 제비가 오는 날이라는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꽃놀이를 즐기며 화전(花煎·찹쌀가루 반죽을 둥글고 납작하게 빚어서 기름에 지져내는 떡으로 계절에 따라 다양한 꽃을 고명으로 얹음)과 함께 술잔에 꽃잎을 띄워 마셨다. 때로는 진달래꽃을 이용한 술, 두견주(杜鵑酒)를 빚었다. 동지가 지난 후 104일이 되는 날인 청명절(음력 3월 1일 전후)에는 무르익은 봄의 맛, 청명주(淸明酒)를 마셨다. 청명주는 찹쌀과 누룩, 물로 빚는다. 이 술을 유독 좋아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은 청명주의 양조 방법을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 담았다. 고려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면천두견주도 대표적인 봄 술이다. 면천두견주는 진달래꽃으로 빚는다.

옛사람들은 단오(음력 5월 5일)에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창포주(菖蒲酒)를 마셨다. 창포 뿌리로 즙을 내어 빚은 술인 창포주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전해진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유두(음력 6월 15일) 무렵이면 옛 조상들은 술과 고기를 장만해 계곡이나 정자를 찾아 풍월을 읊으며 감칠맛과 상쾌함을 주는 동동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칠월 백중(음력 7월 15일)은 농부들이 여름 휴식을 취하는 날이었다. 농악을 울리며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또한 옛사람들은 여름에 과하주(過夏酒)도 즐겨 마셨다. 과하주는 ‘여름을 보낼 수 있는 술’이라는 뜻으로 더운 여름 술의 변질을 막기 위한 선조의 지혜가 담겨 있다. 과하주는 곡식과 누룩, 물을 기본원료로 발효시키는 발효주를 빚은 뒤 증류한 소주를 넣어 도수를 높인 술이다. 도수가 높아 오래 둬도 쉽게 변질하지 않는다.

가을 술로는 신도주(新稻酒)가 있다. 신도주는 햅쌀로 빚은 술이다. 예전에는 추석(음력 8월 15일) 차례상에 신도주를 송편과 함께 올려 조상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지역별로 만드는 방법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해 처음 수확한 햅쌀로 지은 귀한 술인 만큼 맑고 깨끗하다. 인심 후한 이들은 신도주를 많이 빚어뒀다가 마을에 놀이패가 찾아올 때 음식과 함께 대접하기도 했다.

겨울인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에는 아침밥을 먹기 전, 차가운 귀밝이술을 마시는 풍습이 있다. 부럼을 안주 삼아 이 술을 마시면 1년 내내 즐거운 소식만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모주(毋酒) 역시 옛사람들이 겨울철 즐겨 마시던 세시주다. 모주는 막걸리에 8가지 한약재를 넣고 하루 동안 끓인 술로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


전통주 일러스트. 사진 안홍근
전통주 일러스트. 사진 안홍근
술의 원료가 되는 곡식.
술의 원료가 되는 곡식.

재조명받는 전통주

최근에는 특급 호텔이 전통주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서울 신라호텔의 한식당 ‘라연’은 코스 요리에 어울리는 전통주를 선보였다. 라연은 신라호텔의 소믈리에와 셰프, 지배인, 전통주 명장이 힘을 합쳐 한식에 어울리는 전통주에 대해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전통주를 선별하는 과정이 까다롭다. 라연은 동의보감, 규합총서, 수운잡방 등 고문헌에 기록된 양조 방식을 재현했거나 대(代)를 이어 술을 빚어온 무형문화재 명인이 만든 전통주를 여러 차례 시음한 뒤 음식과 어울리는 짝을 찾는다. 은은한 생강향이 나는 해삼초에는 배와 생강이 함유된 이강주를 곁들이도록 하는 식이다.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홍대 앞의 라이즈호텔은 전통주를 이용한 칵테일을 선보였다. 주요 소비층인 2030세대가 남과 다른 것을 추구하는 소비 트렌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결과다.

사진작가, 디자이너 출신이 빚는 전통주도 있다. 밝은세상영농조합이 만든 막걸리 ‘호랑이배꼽’은 서양화가인 이계송 화백이 빚은 술이다. 지금은 속옷 디자이너 출신의 큰딸 혜범씨와 사진작가 출신의 막내딸 혜인씨가 양조장을 물려받았다. 작명 센스도 특이하다. 호랑이배꼽이라는 이름은 한반도를 호랑이 모양으로 봤을 때, 배꼽 자리에 위치한 평택에서 빚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밝은세상영농조합이 만드는 증류주 소호의 라벨엔 ‘술 마시는 동안 항상 봄이길’ 바라는 뜻을 담은 이 화백의 추상화 ‘상춘’이 담겼다. 이 역시 딸들의 아이디어다.

미국인이 미국에서 빚어 미국에서 판매하는 소주도 있다. 미국 브루클린에 사는 남성인 브랜 힐은 2016년 2월 ‘토끼(Tokki)’라는 이름의 소주를 출시했다. 토끼해였던 2011년 한국을 찾아 소주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이 탄생 배경이다. 소주 토끼의 겉면에는 토끼 일러스트레이션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전통주는 한국인에게만 통하는 게 아니다. 지난 4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밀라노 디자인 위크’ 현장에서 양조장 복순도가의 프리미엄 막걸리는 외국인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곧 가을 나뭇잎이 떨어질 계절이다. 낙엽처럼 숱한 전통주를 모두 맛보기엔 이 계절이 짧기만 하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