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천동 삼십삼경의 마지막, 덕유산 향적봉. 사진 이우석
구천동 삼십삼경의 마지막, 덕유산 향적봉. 사진 이우석

국내에는 명품 계곡으로 불리는 곳이 많다. 산세 좋은 곳이면 어디든 아름다운 계곡이 있게 마련이지만 명품 계곡의 뜻은 좀 다르다. 명품이란 말을 붙이려면 오랜 시간 명성을 쌓아오면서 모두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산이 많은 대한민국에는 계곡도 많다. 숱한 계곡 중 전라북도 ‘무주구천동’은 최고 명품 계곡으로 꼽으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이는 곳이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무주는 오지였다. 2001년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개통하며 무주는 수도권으로부터 퍽 가까워졌다.

이전에는 함경도 삼수갑산, 경상북도 BYC(봉화·영양·청송) 등과 함께 내륙 대표 오지로 꼽히는 곳이 전라북도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이었다. 이처럼 오지였음에도 덕유산 무주구천동의 명성은 높았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칭송하며 유람을 갈망했고, 현대에 와서도 먼 길을 주저하지 않을 만큼 좋은 풍광의 계곡인 까닭이다.

고산준령 청정 산골에 흘러내리는 맑고 고운 물줄기, 짙푸른 나무 그늘 밑을 흐르는 그 차가운 물에 발이라도 담근다는 상상을 한다면, 무더위쯤은 당장 뇌리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녹음 짙은 구천동 계곡에는 이미 딱딱하게 말라붙은 도시의 찌꺼기라도 당장 씻어낼 물이 콸콸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주구천동의 시원한 물줄기. 사진 이우석
무주구천동의 시원한 물줄기. 사진 이우석

28㎞ 이르는 구천동 33경

회사든 단체든 대표는 하나다. 산도 그렇다. 전북 장수와 경남 거창, 함양이 덕유산을 나눠 품었어도 역시 덕유산의 대표는 무주다. 향적봉을 오르는 설천면이 무주에 있고 명승지로 유명한 구천동을 안은 덕이다.

구천동(九千洞), 명칭부터 어색하다. 보통 무슨 산, 무슨 계곡으로 칭하는데, 따로 거창한 이름을 뒀다. 훗날 붙인 행정구역도 아니다. 구곡양장으로 고불고불 흐르는 깊은 계곡에는 한때 절집이 14곳이나 있었는데, 수행하는 불자가 9000명이나 된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무려 28㎞에 이르는 구천동과 인근에는 삼십삼경(景)의 포인트가 있다. 삼십삼경이라니, 보통은 팔경(八景)이 아닌가. 관동팔경이니 단양팔경이라는데 무려 삼십삼경이 내려오는 블록버스터급 명승지다. 1경 나제통문부터 33경 향적봉까지 둘러보는 데 꼬박 사나흘은 걸린다.

구천동은 나눠 보는 것이 좋다. 15경 월하탄에서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계곡은 따로 내구천동으로, 설천의 끝자락 나제통문부터 14경 수경대까지는 외구천동으로 구분한다. 물이 평행을 이루는 길이 내구천동의 시작이다. 맑은 물은 콸콸 내리고 도시의 때 묻은 사람은 슬슬 오른다. 이 둘은 냉기와 감탄으로 서로 교감한다. 죽죽 뻗은 등산로 시작 부근에 월하탄이 있다. 벌써 쏟아지는 물소리가 기를 죽인다. 귀로만 듣는데도 체온이 내려가는 듯하다. 집채만 한 바위틈으로 두 줄기 물이 쏟아지다 서로 만난다. 높이는 얼마 되지 않지만 빠른 유속의 물은 바위에 부딪히며 돌종 두드리는 소릴 낸다.

옆에는 선녀탕이 있다. 정말 도교의 그림 같은 소(沼)다. 시작부터 기가 죽는다. 백련사를 향해 거슬러 오르는 길, 갑자기 넓어지더니 나뭇가지가 하늘을 연다. 달이 물에 찍힌다는 14경 인월담(印月潭)의 등장이다. 굽은 못의 모양새가 비파를 닮았다는 19경 비파담(琵琶潭)엔 너럭바위를 옆에 두고 수정 같은 물이 그득 고였다. 일부러 코스를 설계한 듯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우람한 산세 틈으로 차가운 물이 소와 폭(瀑), 대(臺)를 이루며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것이 구천동 계곡의 특징이다. 28경 구천폭포에 이르자 쏟아지는 물가 바위엔 누군가 심어놓은 듯 외로운 꽃 한송이가 올라앉아 있다. 이끼 덮인 돌멩이, 명품 계곡 주변은 죄다 귀한 분재처럼 근사하다.

이속대(31경)는 많은 이가 쉬어가는 곳이다. 이곳은 잠시 땀을 식히며 내구천동의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대합실이다. 바로 위에 들어앉은 고찰 백련사(32경)를 지나 마지막 33경 향적봉에 오르기 위해서다. 기승전결이 예사롭지 않다. 눈을 위해 다리가 수고해야 하는 길이지만 걷다 보면 온몸이 덩실덩실 춤을 춘다. 조금은 비겁하지만(?) 향적봉에 오를 때 곤돌라를 탔다. 덕유산 리조트에서 타는 곤돌라는 불과 25분 정도만에 설천봉(1520m)에 데려다 줘, 그곳에서 600m만 가면 향적봉(1614m)에 설 수 있다.

향적봉에 오르면 가까운 적상산부터 멀리 지리산, 민주지산까지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차가운 계곡에서 땀을 식히고 하늘 아래 파도처럼 굽이치는 산하를 내려다보는 즐거움, 여름날의 호사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6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대한민국 태권도 메카 태권도원이 설천면에 있다. 체험·상징·수련 등 총 3개 지구로 나뉜 태권도원은 세미나와 연수·전지훈련이 가능한 곳이다. 체험지구(도전의 장)는 태권도 체험과 문화 콘텐츠 향유 경기장(4500여 석), 박물관, 체험관, 공연장(500여 석) 등이 있다. 수련지구(도약의 장)는 교육, 수련, 인성 함양, 치유·힐링 연수원 4개동, 연구소, 운영센터, 다목적 운동장 등을 갖췄다. 상징지구(도달의 장)에선 태권 정체성 공유 태권전, 명인관, 명예공원 등을 만날 수 있다.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수원은 콘도미니엄 스타일로 지어졌으며, 식사동에서 식사도 가능하다.

축제 무주군은 휴가 성수기를 맞아 8월 10일 구천동 다목적 광장에서 ‘한여름 밤의 낭만 콘서트’를 개최한다. 레이디티와 별 사랑, 조승우, J모닝, 지혜, 박혜신 등 초대가수 공연이 열린다. 마술쇼, 매직비눗방울, 난타, 변검, 매직훌라후프 공연도 한다.

먹거리 무주구천동 주차장 앞에는 여느 명산 입구처럼 산채정식집들이 즐비하다. 전주한식당은 직접 담근 장과 신선한 나물로 한 상 가득 차려내는 밥이 맛있다. ‘소간(소의 간)’과 모양도 맛도 꼭 빼닮은 소간버섯에 취나물, 참나물, 더덕 등 반찬 가짓수도 많지만 하나하나 손 안 가는 것이 없을 정도의 상차림을 자랑한다. 맑은 물에서 채취한 올갱이(다슬기)에 집 된장을 넣고 끓여낸 올갱이국도 맛좋다. 무주읍 앞섬 마을에는 평생 금강 줄기에서 내수면 어업을 해온 어부가 운영하는 앞섬 어부의 집이 있다. 직접 잡은 쏘가리, 빠가사리, 마지 등으로 칼칼하게 끓인 민물매운탕 맛이 일품이다.

무주덕유산리조트 회원제 골프장 18홀, 숙박 1510실(유스호스텔 제외), 세미나실(28실), 프랜차이즈 식당과 커피숍 등을 비롯한 식음업장과 노천탕, 사우나, 찜질방 ‘세인트 휴’ 등 각종 편의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ATV 체험, 전천후 테니스장(7면), 레포츠 시설도 구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