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가 입점한 하노이의 쇼핑명소 이온(AEON)몰의 야경. 사진 블룸버그
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가 입점한 하노이의 쇼핑명소 이온(AEON)몰의 야경. 사진 블룸버그

‘미 제국주의를 박살 내자.’

북한에서만 접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문장은 베트남전쟁(1964~75년) 당시 미국에 맞서 싸웠던 월맹(북베트남)의 선전 구호이기도 했다.

북한과 베트남은 과거 미국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북한은 3년간 계속된 한국전쟁에서, 베트남은 20년 가까이 이어진 베트남전쟁 기간 중 1973년 미군 철수 전까지 9년 동안 세계 최강국 미국과 총부리를 겨눴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9만5000명에 달했다(한국전쟁 3만7000명, 월남전 5만8000명).

과거 월맹의 수도로 미군 폭격의 중요한 타깃이었던 하노이가 제2차 미·북 정상회담 개최지로 낙점받은 이유를 두고 뒷얘기가 무성하다. 하노이는 베트남전쟁 막바지인 1972년 12월 미군이 B-52 폭격기를 동원해 대대적인 폭격(일명 ‘크리스마스 폭격’)을 가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4만t이 넘는 폭탄이 투하됐고, 1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노이 시민들이 땅굴(지하 방공호) 생활에 워낙 익숙했기 때문에 그나마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애초 협상 장소로 미국은 다낭을, 북한은 하노이를 고집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주둔지였던 다낭은 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국제적인 휴양지가 된 지 오래다. 북한 대사관이 있는 하노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 주석을 만나기 위해 두 차례(1958년·64년)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목적지였다.

미국이 회담 장소를 두고 ‘통 큰’ 양보를 한 것은 베트남 회담의 상징성이 그만큼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국이 생각하는 베트남 회담의 상징성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베트남식’ 개혁·개방과 대미 관계 개선 유도, 그리고 최대 경쟁국인 중국에 대한 압박이다.

대북 외교 성과를 재선(그리고 어쩌면 노벨평화상 수상)의 지렛대로 삼기 원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입장에서도 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나오게 하기 위해 어느 정도 양보는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평양과의 거리가 로스앤젤레스~시카고 거리보다 가까운 데다 동맹국인 중국 상공만 통과하면 되는 베트남을 회담 장소로 결정한 것부터가 북한을 위한 배려로 볼 수 있다. 평양~하노이는 직항으로 약 4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미국이 양보의 미덕을 발휘한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베트남이 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일군 경제 성장의 결실을 북한에 각인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한때 북한의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베트남과 북한의 대미정책 기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극과 극의 대조를 이뤘다.

베트남은 1986년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Doi Moi·쇄신)’를 앞세워 적극적으로 외국 자본 유치에 나섰다. 미국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3년에 대(對)베트남 제재를 풀었고, 2년 뒤인 1995년에는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투자와 원조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개혁·개방의 효과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어 2001년에는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발효했고, 2006년에는 미국으로부터 ‘항구적 정상교역 관계(PNTR)’ 지위를 획득했다. 그 결과 1995년 4억5000만달러였던 미국-베트남 교역 규모는 2016년 520억달러(약 58조4500억원)로 130배 가까이 늘었다. 1986년 421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7년 2343달러로 6배 가까이 뛰었다(만연한 지하경제를 고려하면 실질적인 GDP는 1인당 3000달러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북한의 1인당 GDP는 1000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경제는 호찌민, 행정은 하노이’는 옛말

미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던 하노이의 위상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 베트남에서 ‘경제는 호찌민(옛 사이공), 행정은 하노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하노이 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 같은 공식도 무너졌다. 베트남 전체 수출의 25%를 담당하는 삼성전자의 현지 휴대전화 생산시설은 하노이 인근 박닌성 옌퐁공단과 타이응우옌성 옌빙공단에 자리 잡고 있다.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리는 빈그룹 본사가 있는 곳도 하노이다.

글로벌 부동산 투자 컨설팅사인 존스랑라살르(JLL)가 1월에 발표한 도시 역동성지수(CMI)에서 지난해 6위에서 올해 3위로 순위가 상승하며 지난해 3위에서 8위로 주저앉은 호찌민을 제치고 베트남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CMI는 전 세계 131개 주요 비즈니스 허브를 대상으로 단기적인 경제, 부동산 시장의 모멘텀을 평가하는 것으로, 인구 추이와 기업 활동, 첨단기술, 연결성, 부동산 투자, 자산 가격의 변화 등 다양한 지표를 근거로 산정한다. 1위와 2위는 각각 인도의 벵갈루루와 하이데라바드가 차지했다. 5위 안에 든 도시 중 인도 도시가 아닌 곳은 하노이가 유일하다.

일본의 공적개발원조(ODA) 협력을 통해 지은 하노이의 관문 노이바이 국제공항 신청사의 위용과 해외 건설사들의 투자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스카이라인이 북한을 핵 포기와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의 ‘집사’인 김창선 북한 국무위원회 부장이 2월 17일 박닌성의 삼성전자 스마트폰 공장 주변을 둘러본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삼성전자 현지법인은 베트남에서 외자 유치 성공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베트남 경제가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성장해 왔다는 점을 들어 북한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트남 개혁·개방 초기와 달리 북한의 경우 문만 열리면 들어가 사업을 하려는 중국과 한국 기업이 많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개방도가 높은 베트남 모델보다 중국식 개혁이 북한 체제 유지에 더 안전할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북한 입장에서 주민과 외국 자본의 접촉이 늘어나는 것을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조경환 세종연구소 안보전략실 객원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베트남의 성공에는 호찌민이라는 걸출한 지도자, 내부의 개혁지향 집단 리더십과 이에 적합한 새 인물 교체가 있어 가능했다며, 북한 정권이 절대 권력의 약화를 감수하면서 개혁·개방을 어디까지 이끌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제2차 미·북 정상회담 베트남 개최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중국 견제다. 경제개발을 매개로 베트남과 북한의 긴밀한 협력을 유도해 북한을 중국의 영향권에서 떼어놓는 것이 목적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1281㎞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다. 참고로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길이는 1360㎞다. 이웃 나라끼리 그런 경우가 많지만, 중국과 베트남도 편한 사이는 아니다. 베트남 사람들끼리 ‘미국과 손잡으면 공산당이 망하고 중국과 손잡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다.

베트남과 중국은 1979년 국경분쟁으로 발발한 중국·베트남 전쟁(중월전쟁) 이후 긴장 관계를 이어왔다. 중국의 공격적인 남중국해 도발도 미국과 베트남 간 협력 강화의 빌미를 제공해 줬다. 제2차 미·북 정상회담 유력 후보지였던 다낭은 중국의 남중국해 진출 저지를 위한 미국·베트남 협력의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해 3월에는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다낭에 기항해 중국을 자극하기도 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 외교 정책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중국의 굴기를 봉쇄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지켜온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지위를 중국에 넘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트럼프는 2017년 12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중국을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규정하며 이 같은 의지를 분명히 했다.


미·중 갈등 속 위상 커질 듯

중국에 대한 트럼프의 적개심은 사업가 시절부터 그 뿌리가 깊었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보름 앞둔 2012년 7월 13일 트위터에 “미국 올림픽 선수단 유니폼은 중국에서 만든 것이다. 유니폼을 불태워버리자!”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이 해킹 등 ‘반칙’을 통해 인공지능(AI)·빅데이터·로봇·우주 기술 등 첨단·군수 산업 분야에서 미국의 지위를 넘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도 트럼프 당선에 큰 원동력이 됐다. 모건스탠리 아시아 지역 회장을 지낸 스티븐 로치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코노미조선’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건 중국의 군사력과 첨단기술”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중국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을 자제하는 것은 북한의 핵 포기를 담보로 한 관계 개선을 통해 중국의 힘을 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2월 5일 신년 국정연설에서 “중국은 수십 년간 우리 산업을 겨냥하고 우리의 지식재산권을 훔쳤다”며 “이러한 미국 일자리와 부(富)의 도둑질을 끝내야 한다”고 강하게 몰아세웠다. 반면 1년 전만 해도 “어떤 정권도 북한의 잔인한 독재보다 더 자국민을 완전하고 악랄하게 탄압하지 않았다”며 비난했던 북한에 대해서는 ‘비핵화’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을 만큼 조심했다.

고립주의에 가까운 외교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트럼프 입장에서는 적에서 동지로 돌아선 베트남의 변화가 북한에서도 되풀이되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북한에 대한 트럼프의 ‘모범답안’인 베트남이 아·태 지역 안보와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오랫동안 높게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미국 연방항공청(FAA)이 베트남항공의 미국행 항공편에 대한 미국 항공사와의 코드 공유가 가능하도록 카테고리 1등급을 부여하기로 한 것도 이 같은 전망에 힘을 실어준다.


Keyword

도이머이 개혁정책 1986년 베트남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슬로건으로, 공산주의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 대외개방과 시장경제의 자본주의를 접목시키는 정책이다. ‘베트남판 페레스트로이카’로도 불린다.

Plus Point

베트남 역사
美·中·佛 막아낸 저력이 자부심의 근원

이용성 차장

베트남전쟁 당시 다낭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 사진 트위터 캡처
베트남전쟁 당시 다낭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 사진 트위터 캡처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강한 자부심의 근원은 무수한 외침을 이겨낸 저력이다.

19세기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요동치는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 잠시 무주공산이 된 베트남을 다시 지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베트남 북부에 이미 독립적인 국가가 형성된 이후였다. 이에 프랑스가 1946년 베트남 하노이 인근 하이퐁(LG전자 공장이 있는 곳이다) 항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베트남전 종전 4년 만에 중국에 승리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4년 8월 2일, 미국 국방성은 자국 구축함 매덕스가 베트남 통킹만에서 월맹군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미국의 계획적인 도발에 의한 조작 사건임이 폭로됐지만, 미국은 이를 구실로 베트남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1975년까지 11년 간(미국은 1973년 철수) 이어진 전쟁은 결국 미국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베트남은 종전 4년 만인 1979년 또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상대는 중국이었다. 1978년 베트남은 친중국 성향의 크메르 루즈가 지배하던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12일 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 정규군은 캄보디아에 주둔했다. 중국으로선 좌시할 수 없는 상황 변화였다.

중국은 20만 대군이 탱크 200여 대를 앞세워 베트남을 공격했다. 전쟁 초반 중국은 베트남 5개 도시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주력 부대를 캄보디아에 두고 있던 베트남은 10만 명의 지역 수비대와 민병대로 중국군과 맞섰다.

전쟁 발발 한 달 만인 3월 16일, 중국은 돌연 ‘베트남을 충분히 손봐줬다’고 발표하며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베트남이 이후에도 오랫동안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수시키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베트남은 국제사회의 제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1989년 캄보디아에서 완전히 철군했다.

“남베트남을 내주면 동남아시아 전체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내주게 된다”는 ‘도미노 이론’의 공포에 사로잡혀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었던 미국은 같은 공산 진영인 중국과 베트남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인은 미국이 생각했던 것처럼 소련·중국의 앞잡이가 돼 동남아 전체를 공산화하려 했던 게 아니라 외세로부터 독립된 통일 국가를 만들려는 방편으로 이념을 택했을 뿐이었다.

이때의 깨달음으로 미국은 중국과 베트남의 실용주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 있게 됐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이용했던 미국이 이제는 부쩍 커버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베트남을 이용하고 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