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오랫동안 철갑선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 들어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오랫동안 철갑선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 들어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성웅 이순신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거북선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80년 전인 태종 13년 실록에 거북선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므로 당연히 그가 최초로 만든 이는 아니다. 다만 이를 이용해서 신화를 만든 인물이 이순신이라는 점에서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의외로 현재까지 거북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발굴 시도가 모두 무위에 그쳤고 단지 문헌 등을 토대로 그 형태와 구조를 추정할 뿐이다. 특히 철갑선의 진위를 놓고 많은 의견이 나오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500원 지폐를 보여주며 우리는 500년 전에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설득해서 선박을 수주했다는 이야기처럼, 많은 사람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정의가 유보된 상태다. 우선 철갑선이 아니라는 이들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사료에 철갑선이라는 내용이 없다는 점을 든다. 또한 기술적으로 철갑을 덮으면 배의 상부가 무거워져서 균형을 잡기 어렵고 속도를 낼 수 없으므로 돌격선으로 부적합한 데다 당시의 제철, 제강 기술로 두꺼운 장갑판을 만들기도 어려웠다고 주장한다.

반면 철갑을 중(重)장갑으로 오해해서 발생한 문제라는 반론도 있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철갑이 두꺼운 장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화공이나 적병의 침투를 막기 위해 대못 같은 방어물이 달린 철편을 장착한 것이라고 본다. 방어용 철편이 오늘날 기준으로는 빈약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방어 수단으로 충분했다.


서울 세종로의 충무공 동상. 거북선은 대단한 돌격선이었지만 단지 이 때문에 이순신이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리더십이 연승의 원천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서울 세종로의 충무공 동상. 거북선은 대단한 돌격선이었지만 단지 이 때문에 이순신이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리더십이 연승의 원천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역사상 최초의 장갑함 간 해전을 묘사한 그림. 수천 년간 바다의 주인공이었던 목조 군함은 이 해전 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역사상 최초의 장갑함 간 해전을 묘사한 그림. 수천 년간 바다의 주인공이었던 목조 군함은 이 해전 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일본도 부인하지 않는 거북선 활약상

설령 철갑선이 아니더라도 거북선이 세계 해군사에 남긴 흔적은 너무 깊고도 굵다. 가장 많이 피해를 본 일본조차도 거북선의 존재와 그 활약상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철갑선에 관한 논쟁이 지속되는 이유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약 250여 년 후인 19세기 중반이 돼서야 본격적인 철갑선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는 동력과 관계가 많다.

수많은 포로 무장한 전열함은 19세기까지 당대 열강 해군력의 중추였다. 그런데 공격력이 향상되었어도 바다에서의 싸움은 결국 내가 살아남아야 최종적으로 이기는 것이다. 방어력이 강화될 필요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철재 장갑으로 주요 부위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철갑선이라 할 수 있는 ‘장갑함(ironclad·선체를 장갑판으로 싸서 무장한 군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방어력을 늘릴수록 선체가 무거워져 속도가 느려지는 점이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증기기관이었다. 1787년 존 피치가 인류 최초의 증기선을 만들면서 수천 년간 이어진 범선의 시대가 종식되었다. 처음에는 기존 범선에 증기기관을 결합한 기범선 형태였지만 19세기 중반이 되었을 때 증기선은 명실공히 바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1862년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역사상 최초로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장갑함 간의 해전이 벌어졌다. 버지니아주 햄프턴 로즈 인근 해역에서 이틀 동안 벌어진 싸움에서 양측 함대의 주축이었던 북군의 모니터(USS Monitor)와 남군의 버지니아(CSS Virginia)가 바로 장갑함이었다.

개전 첫날 등장한 버지니아에 의해 북군의 목조 군함들은 일방적이라 할 만큼 유린당했다. 공격력은 비슷했지만 버지니아를 타격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군은 둘째 날 모니터가 전투 공역에 도착함으로써 전력의 균형을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이 해전을 통해 목조 군함이 더 이상 활약할 수 없음이 입증되면서 각국은 장갑함 도입에 나섰다.

이처럼 변화를 겪으며 군함은 더욱 단단해졌고 더불어 선박 건조 기법도 비약적인 향상을 이뤘다. 1860년 제작된 영국의 장갑함 워리어(HMS Warrior)는 함 내를 여러 수밀 구획으로 나누어 한 구역이 파손되더라도 침몰하지 않도록 제작됐다. 이는 군함이 아니더라도 이제 모든 선박이 안전을 위해 채택하는 당연한 구조가 됐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거북선이 철갑선인지의 여부는 충분히 논쟁거리가 될 만한 주제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거북선이 세계 해군사에 영원히 빛날 기념비적 군함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원균이 같은 함정을 가지고도 치욕적인 대패를 기록한 칠천량 해전의 사례에서 보듯이 거북선도 무적의 군함은 아니었다.

결국 어떤 군함이 전설로 남는 것은 그것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가장 절실히 승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이끌었기에 거북선의 전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법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아무리 좋은 최신함이라도 결국 지휘 능력에 따라 승패가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