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스타벅스는 3월 30일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다. 1971년 당시 28세였던 3명의 창업자가 미국 시애틀에 연 작은 커피 가게가 시작이었지만, 그 본격적인 성장은 1987년 하워드 슐츠가 인수한 뒤 이뤄졌다. 슐츠는 스타벅스에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바의 풍모를 입혀 미국 전역을 넘어 전 세계로 손을 뻗쳤고, 오늘날 80개국에 3만1000개 매장을 개설해 34만9000명을 고용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차(茶)의 본고장’ 중국에도 1999년 진출했다. 현재 중국 190개 도시 4700개 매장을 운영하면서 ‘차 문화’를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슐츠는 지난 1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미⋅중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중도 노선을 표방하는 슐츠는 2012년 이래 공개적으로 미 대선 출마 검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슐츠의 인생 10장면을 정리해 본다.


1│절망의 가정 슐츠는 1953년 미국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빈민가를 재개발하면서 지은 저소득층용 임대아파트에서 자랐다.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던 외할머니가 이 집에서까지 노름판을 열면서, 노름꾼들에게 밀린 슐츠 형제들은 일주일에 며칠씩 방 안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으로, 트럭을 운전해 생계를 꾸렸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다. 걸핏하면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손찌검을 한 인물이었고, 한때 빙판길에 미끄러져 골절상을 입어 실직해 집 안에 내내 누워 있는 등 무능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슐츠의 뇌리에 박혀 있다.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때때로 분노와 폭력적 행동을 보였다. 슐츠 부모는 주변에 빚을 지기 일쑤였고, 아들을 지인의 집에 보내 돈을 빌려오라고 하기도 했다.

슐츠는 단지 내 공터에서 농구와 풋볼(미식축구) 경기를 하며 놀았고, 공원 벤치에서 체스를 즐겼다. 그는 “내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곳은 공터, 스포츠 경기장, 체스판뿐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워드 슐츠가 1983년 밀라노에서 맛본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는 스타벅스를 새로운 기업으로 만들었다. 스타벅스는 2018년 밀라노에 매장을 열었다. 사진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가 1983년 밀라노에서 맛본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는 스타벅스를 새로운 기업으로 만들었다. 스타벅스는 2018년 밀라노에 매장을 열었다. 사진 스타벅스

2│대학과 학자금 대출 슐츠는 성적이 그리 우수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고등학교 3년 내내 풋볼을 했고, 이를 통해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뉴욕 주민이기에 뉴욕시립대에 진학하면 거의 무료로 다닐 수 있었지만, 집을 떠나고 싶었다. 결국 노던미시간대 풋볼팀 합류를 시도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실패했다. 대신 당시 연방정부가 최초로 실시하는 민간인 학자금 대출 프로그램을 신청하면서 노던미시간대에 남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했고, 당시의 많은 대학생처럼 헌혈을 해서 현금을 받기도 했다.

슐츠가 대학에 진학한 이듬해 미국 정부는 베트남에 파병할 군인을 뽑는 4차 징병 추첨을 했다. 다음 해 스무 살이 되는 미국 전역의 젊은이 가운데, 생일이 같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 징집 순서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슐츠의 생일이 332번에 뽑히면서 징집 가능성은 사실상 줄었고, 모병제로 전환되면서 이 추첨은 무효가 됐다. 그는 주변에 베트남전쟁을 반대한다고 말했지만, 실제 거리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참전 용사들에게 존경을 보냈다.

슐츠는 1975년 커뮤니케이션학 학사를 받으며 노던미시간대를 졸업했다. 대학 입학과 졸업은 어머니의 꿈이었고, 가족 중에선 처음이었다. 그러나 돈이 없어 졸업식엔 가족 중 누구도 가지 못했다.


3│직장인으로 거듭나다 대학을 졸업한 뒤 목표를 잃은 슐츠는 미시간의 한 스키장에서 잠시 일한 뒤 뉴욕으로 돌아왔다. 돈을 빨리 벌어야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재주를 살리겠다는 목표를 세우자, 영업직을 택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첫 직장은 아페코라는 사무용 복사기 회사였다. 좋은 실적을 올리게 되자, 경쟁사인 제록스에 스카우트됐다. 슐츠는 제록스의 영업 기법과 프레젠테이션 기술 같은 유용한 비즈니스 스킬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키워온 경쟁심과 발로 뛰는 부지런함 그리고 상대에 대한 적극적인 호기심을 바탕으로 인정받는 세일즈맨이 되었다.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 그는 한 단계 높은 삶을 추구하게 됐다. 사실상 첫 직장이었던 제록스에서의 3년을 마무리하고 옮긴 곳은 햄머플래스트라는 스웨덴계 생필품 기업이었다. 슐츠는 B2B에서 B2C로 직종을 바꿔 유럽산 커피 기계를 미국 시장에 팔면서 판매 담당 임원에까지 올랐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전 회장이 중국 상하이 스타벅스 리저브 개장 전, 소개를 하고 있다. 2017년 12월 문을 연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벅스 매장으로, 슐츠는 스타벅스의 중국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슐츠는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의대중 무역압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사진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전 회장이 중국 상하이 스타벅스 리저브 개장 전, 소개를 하고 있다. 2017년 12월 문을 연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벅스 매장으로, 슐츠는 스타벅스의 중국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슐츠는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의대중 무역압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사진 스타벅스

4│스타벅스와 만남 슐츠는 커피 기계 판매량 수치 가운데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시애틀의 스타벅스라는 매장에 판매하는 커피 기계 수가 메이시백화점 판매량보다 많았던 것이다. 매달, 매 분기 판매량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시애틀에 가보겠다고 마음먹었다. 1981년 처음 스타벅스 매장에 발을 들여놨을 때의 경험에 대해 슐츠는 이렇게 말했다. “참 감상적인 표현이지만, 집에 온 것 같았다. 설명하기 힘든데, 내가 아주 특별한 곳에 있다고 느꼈고 커피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창립자들을 만나 좋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말했다. ‘내 직업 인생에서 계속 찾고 있었던 게 바로 이거였어’라고.”

당시 미국에선 가볍게 볶은 원두로 내린 뒤 보온병에 담은 커피나 인스턴트 가루 커피가 일반적이었는데, 스타벅스는 좋은 원두를 다크 로스팅 기법으로 볶은 뒤 판매하고 있었다. 슐츠는 이듬해 스타벅스의 소매 판매 및 마케팅 담당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슐츠는 중산층 가정 출신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셰리 커시와 결혼했다.


5│밀라노에서의 충격 슐츠는 1983년 이탈리아 밀라노 국제소비재박람회 참석차 출장을 가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곳의 에스프레소 바에선 바리스타라고 불리는 직원이 커피를 추출하면서 바에 앉은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손님들도 다양해서 사회생활을 하는 남성은 물론,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 교복 차림의 학생, 은퇴한 노인 등 지역 주민의 일상적인 공간이 되어 있었다. 커피를 중심으로 모인 공간이 사람들의 일상의 일부가 되고, 편안한 커뮤니티가 된 것에 슐츠는 감명받았다. 그가 우울한 유소년기에 공터나 공원에서 느끼던 소속감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슐츠는 미국으로 돌아와 스타벅스 창업자들에게 커피숍 사업을 제안했다. 매장 내 작은 에스프레소 바를 시범운영하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창업자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슐츠는 1985년 스타벅스를 떠나 ‘일지오날레(이탈리어로 ‘매일’이라는 뜻)’라는 커피 바 체인을 창립했다. 자금 모집이 쉽진 않았지만 슐츠는 발로 뛰어 수백 명을 만났고, 수십 명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비록 스타벅스의 변신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창업자 가운데 제리 볼드윈과 고든 보커는 슐츠의 아이디어에 투자했다. 일지오날레는 스타벅스 로스팅 원두로 이탈리아식 커피를 팔아 새로운 문화를 만들며 시애틀에 매장 세 곳을 여는 등 성공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