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박스데일 기지를 방문한 러시아의 Tu-95(꼬리날개 부분에 붉은 별이 있는 폭격기)와 B-52(아래쪽). 두 전략폭격기 모두 1950년대 초에 개발됐음에도 지금도 활약 중이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만이 전략무기로 폭격기를 운용 중이다. 사진 위키미디어
1992년 박스데일 기지를 방문한 러시아의 Tu-95(꼬리날개 부분에 붉은 별이 있는 폭격기)와 B-52(아래쪽). 두 전략폭격기 모두 1950년대 초에 개발됐음에도 지금도 활약 중이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만이 전략무기로 폭격기를 운용 중이다. 사진 위키미디어

전략폭격기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오래된 핵폭탄 운반체지만 장거리 미사일처럼 다양한 대체 수단이 등장하면서 효용성이 대폭 감소했다. 사실 폭격기 단독으로 대양이나 대륙을 건너가 강력한 방공망을 구축한 나라의 중심부를 폭격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속도가 느리고 기동력도 떨어져 전투기나 대공미사일에 요격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종종 국내 방공식별구역(KADIZ)에 러시아 폭격기가 무단 진입해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벌어지지만 사실 전시라면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하다. 이처럼 효용성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 미국과 러시아가 굳이 전략폭격기를 운용하고 있는 이유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핵잠수함(SSBN)과 더불어 핵폭탄 운반 수단을 다양화하기 위해서다.

특히 미국은 1930년대 이후 폭격기 분야에서 경쟁을 허락하지 않는 나라다. 미국은 꾸준히 해당 분야의 전력을 업그레이드해왔다. 그런데 B-52 폭격기는 최종 생산한 지 57년이나 됐을 만큼 오래된 기종이다. 당연히 이를 대체하기 위한 사업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여러 우여곡절로 인해 아직도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1960년대에 대체작으로 추진된 XB-70 폭격기는 23㎞의 고고도를 마하 3의 속도(약 시속 3572㎞)로 비행할 수 있었지만 방공망에 쉽게 포착돼 프로젝트가 취소되었다. 대신 1970년대 초에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저고도로 침투하는 B-1 폭격기 개발이 시작됐으나 카터 행정부의 취소와 이후 레이건 행정부의 재개 등 부침을 겪으며 양산 물량이 100대로 대폭 축소됐다.

이러한 난맥상은 처음 언급처럼 전략폭격기의 효용성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책 당국자들은 폭격기가 값비싼 무기지만 생존 가능성이 형편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도 해당 전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미 공군은 새로운 개념의 전략폭격기를 구상했다. 아예 방공망에 걸리지 않는 스텔스 기능으로 적진까지 은밀하게 비행할 수 있는 폭격기였다.

그렇게 1980년대 초부터 새로운 전략폭격기 도입 사업이 비밀리에 시작됐다. 이런 내용을 공표하지도 않고 지금보다 정보 공개에 대해 인색했던 시기였음에도 엄청난 폭격기가 개발 중이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런 극히 단편적인 소식 이외에 정작 주인공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1988년 11월 22일, 마침내 B-2로 명명된 폭격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너무 비싸 B-52를 완전히 대체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주익(主翼·비행기 동체 좌우로 뻗은 날개)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듯한 B-2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감탄했다. 비행기라면 으레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관념을 무시한 전익기(全翼機·날개만 있고 동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항공기)였다. 그런데 전익기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방산 기업인 노스럽그루먼의 전신 중 하나인 노스럽의 창업자 잭 노스럽(Jack Northrop)은 전익기 개발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이미 1920년대부터 관심을 갖고 개발에 나서 1941년 7월 3일 최초의 전익기인 N-1M이 비행에 성공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전익기가 장거리 대형기에 적합한 구조임을 알게 됐다.


1989년 최초로 공개 비행에 나선 B-2 전략폭격기. 전익기는 최첨단 기술력의 상징 같지만 의외로 역사가 오래된 기체 구조다. 사진 위키피디아
1989년 최초로 공개 비행에 나선 B-2 전략폭격기. 전익기는 최첨단 기술력의 상징 같지만 의외로 역사가 오래된 기체 구조다. 사진 위키피디아
1948년 7월 5일 실험 비행 중인 YB-49. 비록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이처럼 오래전부터 쌓은 기술력이 있었기에 B-2가 탄생한 것이다.사진 위키피디아
1948년 7월 5일 실험 비행 중인 YB-49. 비록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이처럼 오래전부터 쌓은 기술력이 있었기에 B-2가 탄생한 것이다.사진 위키피디아

과거의 실패에서 얻은 성공의 실마리

바로 그즈음 육군항공대(현 공군)가 1만 파운드의 폭탄을 탑재하고 1만 마일을 비행할 수 있는 폭격기 도입 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노스럽이 제안한 전익기도 당국의 승인을 받아 XB-35라는 이름으로 1941년 11월부터 개발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연구는 계속됐고 종전 직후인 1946년 실험용으로 총 15기가 완성됐다.

하지만 XB-35는 최종 경쟁에서 B-36에 패했고 2기가 제트 엔진을 장착한 YB-49로 개조됐으나 추락 사고 등을 겪으며 1950년, 개발이 취소됐다. 전익기는 기체 전체로 양력을 얻어 쉽게 떠오르고 장시간 체공할 수 있는 구조지만 자세 제어가 대단히 어렵다. 결국 당시의 기술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해서 그의 도전은 아쉽게 중단됐다.

그런데 YB-49가 시험비행 중 종종 레이더에서 사라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당시에는 레이더 고장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전익기가 스텔스 구현에 적합한 형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해당 분야에 노하우가 많은 노스럽이 B-2의 개발 주체가 된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컴퓨터, 플라이-바이-와이어(Fly-by-Wire)처럼 엄청난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꿈을 실현했다.

이처럼 B-2는 실패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력이 있었기에 탄생했다. 이는 무기뿐만 아니라 기업의 경영에서도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다. 연구·개발, 마케팅에서의 실패를 용인하지 않고 단지 결과만 놓고 책임만 물으려 한다면 결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한마디로 단지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야 할 경험이나 기술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