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미국 유학 중이던 19세에 세운 인생 계획은 △20대에 사업에 이름을 내건다 △30대에 사업 자금을 모은다 △40대에 사업에 큰 승부를 건다 △50대에 사업을 완성시킨다 △60대에 사업을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 등의 내용이다. 그는 대부분 계획을 완수했다.

단, 마지막 사업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은 유예된 상태다. 그는 59세이던 2016년 “인류사 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와 그 도전에 제대로 달려들고 싶다. 기왕이면 캡틴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지난 호에서 보았듯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였던 25세 때 손정의가 ‘5년 시한부’에 가까운 만성간염 진단을 받았던 때에도 이 계획은 무산될 뻔했다.


5│병실 경영 손정의는 3년 반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많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병실에 컴퓨터와 팩스, 전화기를 놓고 원격 경영을 했다.

한편으로는 대기업 출신 인사를 영입해 사장을 맡겼는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여전히 벤처기업의 색채가 진한 소프트뱅크에 신임 사장이 대기업 문화를 적용하려다 마찰이 일어난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이 회사를 떠났다. 다행히 손정의의 간염은 신규 치료법으로 치유됐다. 임시 사장을 내보내고 1986년 손정의가 복귀했고, 소프트뱅크 인력을 빼갔던 경쟁사는 오히려 실패했다.


6│버블에 올라타다 손정의는 전화를 걸 때마다 가장 저렴한 회선을 연결해주는 시스템을 동업해 만들면서 전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때 번 돈으로 본격적으로 외국 기업과의 거래에 나섰다. 소프트뱅크는 마이크로소프트(MS)로부터 일본 내 윈도3.1의 독점판매권을 따냈고, 노벨의 일본 합작 법인도 설립했다. 1994년엔 일본 증시에 상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인수합병(M&A)에 나섰다.

1995년 인수한 세계 최대 IT 전시회 컴덱스와 세계 최대 IT 미디어 그룹 지프 데이비스에 대해, 손정의는 이때 향후 IT 사업의 지도와 나침반을 확보했다고 표현한다. 이를테면, 해마다 컴덱스 개최 직전 일요일에 빌 게이츠와 골프를 쳤다. 컴덱스의 오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망 기업 대표들과 행사 중에 따로 식사도 할 수 있었다. 애초 지프 데이비스의 ‘PC WEEK’는 빌 게이츠가 손정의에게 추천한 잡지였는데, 아예 회사 전체를 사들여 정보의 길목을 거머쥔 셈이었다.

이때 발견한 보물이 야후였다. 손정의는 창업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야후를 찾아가서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를 설득해 34%의 지분을 확보했다. 일본에선 야후와 합작해 야후재팬을 만들었다. 야후는 훗날 구글에 밀려 사실상 몰락했지만, 야후재팬은 야후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소프트뱅크 그룹의 기업이 된다. 그리고 일본 최대 포털 서비스로서 손정의에게 꾸준한 수익을 안겨주는 효자 기업이 됐다.

1990년대 말 야후 주가가 급등했고, 손정의는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소프트뱅크는 자회사 10여 개, 손자회사 120여 개의 대그룹이 됐다. 손정의의 재산은 1주일에 1조엔(약 10조원)씩 늘어났다. 하지만 2000년부터 시작된 ‘닷컴버블의 붕괴’를 손정의도 피하지 못했다.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로 떨어졌다.


손정의는 자신만의 M&A 문법을 개척했다. 가령 협상은 한방에 끝냈다. 컴덱스 인수 당시 손정의는 상대에게 “금액을 말하시오. 타당하면 흥정 없이 지불하겠소. 예상치 밖이면 물러나겠소”라고 했다. 상대가 부른 8억달러를 손정의는 두말없이 받아들였고, 협상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진 블룸버그
손정의는 자신만의 M&A 문법을 개척했다. 가령 협상은 한방에 끝냈다. 컴덱스 인수 당시 손정의는 상대에게 “금액을 말하시오. 타당하면 흥정 없이 지불하겠소. 예상치 밖이면 물러나겠소”라고 했다. 상대가 부른 8억달러를 손정의는 두말없이 받아들였고, 협상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진 블룸버그

7│초고속인터넷 도전 거품이 꺼진 뒤 손정의는 초고속인터넷(브로드밴드) 사업에 나섰다. 느려 터진 일본 인터넷 속도를 개선하겠다는 목표였다. 사내외 반대가 많았고, 일본 최대 통신 기업 NTT 등이 과점한 구도여서 장애도 많았다. 손정의는 ‘제2의 창사’를 내걸고 본인이 직접 하루 15시간 이상 진두지휘하면서 인생을 걸었다. 회선, 기지국 등 NTT의 협조가 원활하게 되지 않자, 총무성을 찾아가 “분신을 하겠다”며 담당 공무원을 협박하는 과격함도 보였다. 지하철역 근처를 거점으로 인터넷 설치 고객을 모집하는 ‘파라솔 부대’도, 모뎀을 무료로 배포하고 정기적인 이용료 수익을 올리는 방식도 소프트뱅크가 처음 시도했다. 소프트뱅크는 초고속인터넷 2위 기업이 됐고, 서비스 개시 4년 만인 2005년 흑자 전환했다.

8│이동통신과 아이폰 이동통신 진출은 일본 M&A 사상 최고가 거래였던 2006년 보다폰재팬 인수를 통해 이뤄졌다. 보다폰은 업계 3위였지만 손정의는 10년 안에 시장 점유율 50%가 넘는 NTT도코모를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경쟁사보다 무조건 200엔(약 2000원) 싼 초저가 요금제, 가입자 간 무료통화 등의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고객들에게 경쟁사보다 많은 보조금을 줄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소프트뱅크가 고안한 2년 약정 단말기 할부제는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제도가 됐다. 소프트뱅크의 이동통신 사업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애플 아이폰이었다. 손정의와 스티브 잡스의 친분과 경쟁사의 머뭇거림 덕에 소프트뱅크는 아이폰을 일본 시장에 독점 공급하게 됐다.


손정의가 이끄는 소프트뱅크는 쿠팡에 2015년 10억달러, 2018년 20억달러를 투자했고, 이는 쿠팡이 급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 됐다. 쿠팡이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서 손정의의 투자 수익은 190억달러에 이르게 됐다. 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의장과 손정의(왼쪽) 회장. 사진 쿠팡
손정의가 이끄는 소프트뱅크는 쿠팡에 2015년 10억달러, 2018년 20억달러를 투자했고, 이는 쿠팡이 급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 됐다. 쿠팡이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서 손정의의 투자 수익은 190억달러에 이르게 됐다. 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의장과 손정의(왼쪽) 회장. 사진 쿠팡

9│은퇴를 번복한 뒤 손정의는 자신이 세운 인생 계획에 의해 ‘60세 생일 은퇴’를 계획했고, 실제 후계자로 공언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1년 앞둔 2016년 그는 은퇴를 번복하고 예비 후계자를 떠나보냈다.

손정의는 이후 미래에 대한 투자에 열을 올렸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빈 살만 왕세자와 손잡고 펀드를 구성해,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을 인수했다. 전 세계 스마트폰 90% 이상이 이 회사의 아키텍처로 설계한 반도체를 쓴다. 우버, 디디추싱, 그랩 등 세계 차량공유회사들도 거머쥐었다. 기존 알리바바 투자에 더해, 쿠팡, 스냅딜(인도), 토코피디아(인도네시아), 라자다(싱가포르) 등에도 투자했다. 그래픽카드 제조사인 엔비디아에 투자해 AI 사업에도 뛰어들었고 공유오피스 기업 위워크에도 투자했다.

손정의는 미래 성장성이 높은 분야의 우량 기업을 인수해 시장 지배력을 높이고 기업 간의 연결성을 높이는 이른바 ‘군(群) 전략’을 취했다. 그는 일찍이 “사업가로 이름을 내기로 한 이상, 목표는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손정의는 이제 ‘세계 최고의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불린다.


10│30년 구상 손정의는 2011년 소프트뱅크 창사 30주년 기념행사에서 향후 30년간의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300년 뒤 인류의 삶을 예상해보며, 30년 뒤 소프트뱅크는 어떤 기업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구상이었다. 그는 소프트뱅크를 ‘정보혁명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를 모토로, 3000개의 기업이 20~40%의 자본 제휴로 묶여있는 분산·분권형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손정의는 ‘무엇을 발명했는가’라고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겠다고 했다. “칩도 아니고 소프트웨어도 아니고 하드웨어도 아니다. 300년 동안 존속할 조직 구조를 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