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사진 위키피디아
자크-루이 다비드의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사진 위키피디아

기원전 480년 8월 그리스 북부 테르모필레로 시간여행을 해보자. 영화 ‘300’으로 유명해진 이 전장에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군 300명을 필두로 한 그리스 연합군 약 5000명이 이곳으로 진군하는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모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 전투에 임한 페르시아군이 100만 명이었다고 썼다. 하지만 실제 테르모필레에서 그리스 연합군 눈앞에 나타난 병력은 10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 페르시아군이 10만 명이 아니라 2만 명이었다고 해도 그리스 연합군 5000명에게는 버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첫날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연합군에 대패했다. 두 번째 날 전투에서는 페르시아 황제의 최정예 부대인 친위대 1만 명을 테르모필레로 보냈다. 하지만 이들마저도 그리스 연합군에 허무하게 패배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는 테르모필레의 지형을 전투에 백배 이용한 덕이다. 테르모필레 서쪽은 경사가 70도에 달하는 험준한 산들이 벽처럼 서 있고, 동쪽은 바다다. 산과 바다 사이 평지는 100m도 되지 않는다. 이 평지는 남쪽으로 내려오면 툭 튀어나온 언덕 때문에 폭이 아주 좁아진다. 동쪽 바다와 육지의 경계는 바위 절벽이다. 고대 그리스는 이 좁은 길에 방어벽을 쌓아 관문을 만들었다.

영화 ‘300’에 대한 티셔츠가 그리스 스파르타 기념품점에서 팔리고 있다. 300은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스파르타군과 그의 숙적 크세르크세스 왕의 페르시아군이 맞붙었던 테르모필레 전투를 다룬 내용이다. 사진 블룸버그
영화 ‘300’에 대한 티셔츠가 그리스 스파르타 기념품점에서 팔리고 있다. 300은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스파르타군과 그의 숙적 크세르크세스 왕의 페르시아군이 맞붙었던 테르모필레 전투를 다룬 내용이다. 사진 블룸버그

그런데도 페르시아군에는 테르모필레를 거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테르모필레는 페르시아 대군이 그리스 중남부로 진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내륙을 통과하려면 산지가 험하고 척박해 나아가야 할 길은 멀어지고 군대는 잘게 흩어졌다. 그리스군으로부터 매복 공격을 당할 만한 험지는 곳곳에 있고 식량과 군수품 보급이 어려웠다.

테르모필레의 지형과 어우러져 전쟁 초반 그리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요인은 청동 군장이었다.

테르모필레의 협곡에는 한 번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에 한계가 있다. 당시 그리스 병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청동갑옷·투구와 방패로 무장했다. 이와 더불어 그리스 병사들은 창과 방패를 이용한 조직적인 집단전투를 훈련해왔다. 특히 스파르타군은 단체 합숙생활로 어릴 때부터 전술을 갈고닦아 눈빛만으로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이상할 정도로 중장갑 보병이 없었다. 페르시아군은 수십 개 국가로 이뤄져있었고 나라마다 무장이 달랐다. 그리스군처럼 중장갑을 갖춘 국가는 2개국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나뭇가지 방패나 가죽방패를 지니고 전투에 임했다. 심지어 투구를 쓴 부대도 드물었다. 페르시아군과 완전 무장한 그리스 연합군의 전투는 청동벽을 나뭇가지로 내리치는 격이었다.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은 무참히 죽어 나갔고, 시체가 더미로 쌓였다고 한다.


당장 보이지 않는 미래에 뛰어들어야 혁신

지난주에 테르모필레를 방문했다. 한적한 시골 벌판에 세워진 기념비 앞에는 꽃이 있었다.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군이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포키스 언덕 정상에도 말라붙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곳은 2500년 동안 사랑과 존경을 받는 전적지(戰跡地)다. 언덕에서 그 옛날 피와 시체가 즐비했을 협로를 바라보며 든 생각은 ‘테르모필레의 지형을 몰랐을 리 없을 페르시아군이 왜 전쟁 초반 패배했을까’였다.

페르시아군의 패배 원인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주했던 태도였다. 이들은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는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페르시아는 넓고 건조하고, 햇볕이 강한 땅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이런 기후를 가진 제국을 지키려다 보니 가볍고 빠른 경장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들이 공격해야 했던 그리스는 산과 바위뿐인 땅이었다. 험준한 지형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이길 수 있도록 무장하고 훈련했어야 했다. 

말은 쉽지만 현실화하려면 어려웠을 것이다. 페르시아 현지에서 이런 훈련을 하면 우스워 보였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장군은 불합리하고 멍청하게 보일까봐 그런 무장과 전술을 갖추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병사들도 이를 거부했을 것이다. 결국 페르시아가 선택한 방법은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테르모필레의 방어벽 앞에 참혹한 대가를 치르면서 무너졌다.

우리가 혁신을 외치면서도 자기 개조가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이 현재 상태를 기반으로 미래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천리 밖의 전장, 1년 후의 미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수경을 쓰고 오리발을 달고 걷는 훈련을 하라고 하면 미친 짓이라고 거부할 것이다. 옛 페르시아군의 한계는 병사들이 가졌던 이 같은 거부감을 설득하지 못한 것이다.

혁신을 위해서는 미래를 예측하라는 말이 있지만, 절대 예측만으론 혁신을 이룰 수 없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는 미래더라도 뛰어들어 준비하고 훈련해야 한다. 혁신에 성공하는 조직과 그러지 못한 조직의 차이는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