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대결에 이어 우크라이나를 두고 미·러가 대결 구도를 형성하면서 안보는 글로벌 경제에 상수(常數)가 됐다. 사진 셔터스톡
미·중 대결에 이어 우크라이나를 두고 미·러가 대결 구도를 형성하면서 안보는 글로벌 경제에 상수(常數)가 됐다. 사진 셔터스톡
최용민 WTCS 대표광운대 경영학 박사, 한국무역협회 전 FTA통상연구실장·전 베이징 지부장·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최용민 WTCS 대표광운대 경영학 박사, 한국무역협회 전 FTA통상연구실장·전 베이징 지부장·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이제까지 ‘경제’와 ‘안보(국방)’, 이 두 단어는 별개로 쓰였지만, 지금 국제 경제 흐름을 보면 둘을 합친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경제와 안보가 동전의 앞뒤처럼 일체형으로 기업 현장을 지배하고, 국가 대외경제 정책의 근간으로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 강대국들은 경제 어젠다를 다룰 때 안보를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단순히 일자리와 기술 유출을 막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안보 차원에서 자국민이라도 외국 기업과 수상한(?) 접촉을 할 경우, 단죄하려는 법규가 경쟁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집권 당시 미·중 대결에 이어 최근 우크라이나를 두고 미·러가 대결 구도를 형성하면서 이제 안보는 글로벌 경제에 상수(常數)가 됐다. 

일본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경제안보에 앞장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통해 국민 생활과 경제에 필요한 중요 물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공급망 강화, 사이버 공격에 대비한 기반 시설 사전 심사, 민관 첨단 기술 협력, 특허 비공개 등에 힘쓰는 한편 각각의 위반 사항에 대한 벌칙 조항도 마련했다. 

사이버 공격에 대비하고 첨단 기술의 유출을 철저히 방지하기 위해 관련 위반자(연구자)를 2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특히 전기, 가스, 석유, 수도, 전기통신, 방송, 우편, 금융, 신용카드, 철도, 화물차 운송, 외항 화물, 항공, 공항 등 14개 분야 중요 시설에 사이버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는 외국 제품(부품)이 사용되지 않았는지 정부가 심사하도록 규정했다. 심지어 이러한 업무에 종사하는 민간 기업이 중요 시스템을 도입할 때 시설 개요, 부품 정보, 유지·관리 위탁기업 등을 기재한 도입계획서를 주무 장관에게 제출하도록 의무화하고, 계획서를 안 내거나 허위로 작성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엔(약 1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조치해 민간 자율의 선을 넘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민간 차원에서 첨단 기술이나 기밀을 유출할 때도 비슷한 수준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지난해 하반기에 일본 정부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는데 매우 특이한 점이 있었다. 경제안보상이라는 자리를 신설해 국가안전보장국, 총무성, 외무성, 방위성, 경제산업성, 재무성, 문부과학성, 경찰청, 공안조사청, 금융청 등에 안보와 관련한 업무를 총괄·지시하도록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또한, 주요 업무를 소개할 때도 ‘정보’보다는 ‘첩보’를 의미하는 ‘인텔리전스(intelligence)’라는 용어를 강조해 경제 위에 안보를 두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국제통상에서 중간자적 입장을 견지해온 유럽연합(EU)은 최근 안보에 방점을 둔 통상조치를 내놓았다. EU는 제삼국의 경제적 위협으로부터 회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시 즉각적인 보복 조치를 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통상위협대응규정’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이 법안은 회원국이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면 상품, 서비스, 외국인 투자, 공공조달, 금융서비스 등으로 대응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의결조건도 만장일치에서 가중 다수결로 완화해 신속한 집행을 가능케 했다. 특히 긴급할 경우, 의결 없이도 EU 집행위가 곧바로 보복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예외도 허용했다. EU가 이처럼 강력한 조치에 첫발을 뗀 것은 WTO(세계무역기구) 상소기구 마비로 다자간 무역 및 통상분쟁 해결이 요원해졌다는 판단과 더불어 안보 관점에서 경제를 봐야 한다는 시각에 기인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내 반도체 연구 지원 및 생산 보조에 520억달러(약 64조5000억원)를 투입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미국경쟁법(The American COM-PETES)’에 대한 입법 절차를 올해 2월 마무리했다. 미국 연방하원이 1월에 발의해 속전속결로 통과시킨 것이다. 이 법안은 지난해 6월에 중국을 견제하고 첨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발의된 ‘미국혁신경쟁법(USICA)’에 비해 보다 공격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된다.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연방 예산을 대거 투입하고 상무부를 실행기관으로 지정해 집행력을 보강한 것이다. 


안보 > 시장경제 흐름도

미국경쟁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해외투자심사 및 규제책이다. 핵심 품목의 공급망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국가안보를 목적으로 해외투자를 규제할 수 있는 제도를 자본주의 시장 국가 중 처음으로 채택했다. 이 같은 규제책은 과거엔 경영상 자율권이 손상된다는 이유로 산업계가 반발하고 이에 미국 금융위원회가 동조해 물거품이 된 적이 있다. 

또한 중국과 같은 비(非)시장경제 국가로부터 수입을 금지하는 기준을 신설했고, 중국은 물론 북한, 러시아, 이란을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해 해당 국가 출신의 연구원이 미국 예산이 들어간 연구개발 및 교육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홍콩 민주주의 관련 예산 배정, 신장위구르 자치구 인권탄압 관련 망명 인사 정착지원 등 중국이 민감해하는 부분도 상당수 미국경쟁법에 포함됐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주로 수비에 의존해 온 중국은 지난해 6월에 ‘반외국 제재법(反外國制裁法)’을 통해 중국 정부나 기업이 외국으로부터 차별적인 제재를 받는 경우 보복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보복 대상을 해당자의 친족까지로 확대하고 대상자(블랙리스트)에게는 입국 거부, 국외 추방, 중국 내의 재산 동결, 중국 기업과의 거래 금지 등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더 무서운 내용은 그다음에 있다. 특정 국가의 부당한 제재에 제삼국이 협력했을 경우, 중국도 같은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명문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조치로 한국 기업이 중국에 대한 수출을 줄이거나 중단한다면 그것도 보복 조치 대상이 될 수 있어 국내 기업들이 미·중 대결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기존에는 경제와 안보는 서로 방향이 다르고, 큰 관련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 시장에선 경제를 위해 안보를 약간 희생하는 측면도 있었다. 일자리 지키기나 경제활성화에 역행한다면서 국가 밖 경제행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경제를 안보의 프리즘에 올려놓고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 상대국에 이로운 행위를 막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법을 통해 강제하고 보복하는 대상에는 기업은 물론이요, 개인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블랙리스트와 첩보라는 단어가 글로벌 비즈니스 한복판을 점령하고 있다. 앞으로 상당 기간 이 같은 흐름은 지속될 것으로 예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