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 사진 로이터뉴스1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 사진 로이터뉴스1

미국 증시를 감시·감독하는 당국인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기후 변화에 칼을 빼 들었다. SEC는 미국 증시에 상장돼 있는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해마다 온실가스 직간접 배출량과 기후 변화에 끼치는 영향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SEC는 2010년부터 기후 변화 관련 공시에 관한 자발적인 지침을 내렸지만 공시 규정을 통해 의무화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SEC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강조해온 기후 변화 관련 대응책 마련에 발맞춘 것으로 보인다.

3일 21일(이하 현지시각) SEC는 새로운 기후 공시 규정안을 공개했다. 이 규정안은 미 뉴욕 증시에 상장한 기업들이 SEC에 해마다 제출하는 연례보고서에 온실가스 직간접 배출량인 스코프(Scope) 1·2 규모를 담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코프 1은 제품 생산단계에서 연료 사용으로 인한 직접 온실가스 배출을, 스코프 2는 전기·스팀·냉방 등 외부 전력이나 열 소비 등에 의한 간접 온실가스 배출을 의미한다.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중대(material)하거나 스스로 온실가스 배출량에 관한 구체적인 목표치를 설정한 기업은 더 넓은 범위의 배출량인 스코프 3도 공개하도록 했다. 스코프 3는 소비자·협력사·물류·투자 등 사실상 모든 기업 활동과 공급망에서 발하는 모든 온실가스 배출량을 뜻한다. 스코프 3 배출량은 공급망 내 기업의 전체 배출량을 추적하기 어려운 분야다. 이로 인해 스코프 3를 공시해야 하는 기업은 큰 부담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공시 내용은 별도의 독립된 감사인이나 전문가들로부터 검토받아야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에 속하는 기업 대부분이 스코프 3를 보고해야 할 것으로 분석했다. 반면 배출량이 중대한지 여부를 상장사가 스스로 판단하게 돼 있어 얼마나 많은 상장사가 스코프 3를 공시하게 될지는 불확실하다고 로이터는 지적했다. 이 때문에 SEC가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스코프 3 공시를 요구할 권한이 있는지를 두고 법적 다툼의 여지도 있을 수 있다. 

이번 규정안에 SEC 위원 4명 중 3명이 찬성했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이날 성명에서 “투자자들이 투자 결정을 하는 데 있어 (기후 변화 리스크 측면에서) 일관되고, 비교 가능하며,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상장사와 투자자 모두 이번 발표에서 제안된 명확한 규정에 따라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안은 초안으로, SEC는 최소 두 달간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친 뒤 올해 하반기에 기후 변화 의무 공시안을 최종 확정할 계획이다. 이 규정안이 도입될 경우 뉴욕 증시에 상장한 대기업은 2023년 사업보고서에 스코프 1·2를, 2024년 사업보고서에 스코프 3를 공시해야 한다. 중견기업은 2024년 사업보고서에 스코프 1·2를, 2025년 사업보고서에 스코프 3를 공시해야 한다. 

미 공화당과 재계는 반발하고 나섰다. SEC 위원 중 유일하게 반대 성명을 낸 공화당 측 헤스터 퍼스 위원은 “수십 년간 유지해온, 일관되고 비교 가능하며 신뢰할 수 있는 회사 공시 체제를 훼손할 것”이라며 “우리는 증권환경위원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 상공회의소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후 소송 리스크가 커질 것이라며 “기업들은 이미 환경 문제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공시하고 있다. SEC의 규정안은 너무 규범적이며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연결 포인트 1
스코프 3로 발등에 불 떨어진 한국 기업

SEC의 결정에서 한국 기업도 자유로울 수 없다. 쿠팡을 비롯해 뉴욕 증시에 상장된 한국 기업 10곳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을뿐더러, 미 대기업 등에 원재료 또는 부품을 공급, 수출하는 한국 기업도 협력사의 지위에서 미국 기업으로부터 온실가스 배출량 공개를 요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번 규정안은 뉴욕 증시에 상장된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므로 뉴욕 증시에 상장된 한국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한국 기업 중 뉴욕 증시에 상장된 곳은 총 10곳인데, 규정안이 이대로 확정되면 모두 SEC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담은 연례보고서를 내야 한다. 쿠팡이 지난해 3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직상장했으며, 포스코·KB금융그룹·신한금융그룹·우리금융그룹·SK텔레콤·KT·한국전력공사·LG디스플레이는 미 예탁증권(ADR)을 활용해 NYSE에 상장돼 있다. 온라인 게임 ‘라그나로크’로 유명한 그라비티는 나스닥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지 않은 한국 기업도 발등에 불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이번 SEC 규정안에서 나온 스코프 3 때문이다. 스코프 3는 소비자, 협력사, 물류 등 기업의 가치 사슬에서 발생하는 모든 온실가스 배출량을 포함하는 범위다. 즉, 스코프 3를 공시하는 미국 기업의 협력사인 우리나라 기업은 직간접적으로 SEC의 기후 변화 의무 공시안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글로벌 기업의 스코프 3 배출량에는 협력사의 스코프 1·2가 해당하므로 글로벌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반도체와 IT(정보기술), 석유화학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스코프 1·2) 공시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압박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웅희 한국회계기준원 지속가능성센터장은 ‘이코노미조선’과 통화에서 “스코프 3를 공시해야 하는 미국 상장 대기업은 자신의 공급망에 포함된 한국 기업들에 온실가스 배출량 공개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SEC가 지난해부터 이해관계자들의 의견 청취를 시작으로 심도 있는 분석을 거쳐 낸 규정안 초안이고, 위원 4명 중 3명이 찬성했기 때문에 주요 내용이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온실가스 배출량을 공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연결 포인트 2
미국에 상장한 중국 기업도 부담

SEC의 이번 규정안이 최종 확정되면 미국에 상장한 중국 기업의 정보 공개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각에서는 SEC의 기후 변화 의무 공시안이 중국 기업 압박 정책의 연장선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번 규정안 법령 적용 대상은 뉴욕 증시에 상장된 전체 기업인데 뉴욕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만 해도 280개가 넘는다. 그중에는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도 포함돼 있다. 이 밖에 중국의 빅테크 기술주인 징둥(京東)과 바이두(百度)도 뉴욕 증시에서 거래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주요 국가 기업들은 이미 사회적 책임의 일환으로 온실가스 배출량 등을 줄여왔지만 중국은 이 국가들보다는 배출량 감축 움직임이 더딘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앞서 SEC는 미국에 상장한 중국 기업에 대해 지속해서 기업 정보 공개 범위를 넓혀왔다. 3월 8일에는 SEC가 중국 바이오 기업 3곳을 포함한 5개 기업을 기한 내 SEC가 요구한 공시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상장 폐지할 것이라며 예비상장 폐지 명단에 올려 압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