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서머스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사진 블룸버그
래리 서머스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사진 블룸버그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사진 블룸버그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사진 블룸버그

“한 세대 내에서 경험하지 못한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 있다.” (래리 서머스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급격하거나 장기적인 인플레이션을 기대하지 말라.” (제롬 파월 Fed 의장)

미국에서 때아닌 인플레이션 논쟁이 붙었다. 미국의 1조9000억달러(약 2100조원) 규모 경기 부양책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보급에 따른 경기 회복 기대감, 반도체, 국제 원자재, 식품 가격 동반 급등에 이어 30년 만에 최강 한파가 미국에 닥치면서 인플레이션 우려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을 지낸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2월 5일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바이든 정부의 대규모 부양책이 규모 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가까운 수준”이라며 “한 세대 내에서 경험하지 못한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면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은 확장적 통화정책으로 인플레이션 없는 완전고용 실현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연준이 2월 17일(현지시각) 공개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에 따르면, 위원들은 1월 26~27일 열린 정례회의에서 “장기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정책 기조를 계속 완화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연준의 정책 목표는 실업률 3.5% 수준의 완전고용과 2.0%의 물가상승률이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현재 수준의 완화 정책을 이어가겠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최근 출간한 저서 ‘클라우스 슈밥의 위대한 리셋’을 통해 “현시점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조만간 발생할 수 있다고 상상하기 어렵다”며 “고령화와 기술 발전 등 장기적인 구조적 추세와 수년간 임금 상승을 제약할 이례적으로 높은 실업률이 모두 인플레이션에 강한 하방 압력을 가한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인플레이션 우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다. 2월 17일 뉴욕 증시는 인플레이션 우려에 혼조세로 마감했다. 기술주가 내리면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과 나스닥은 각각 전장보다 1.26포인트(0.03%) 하락한 3931.33과 82.00포인트(0.58%) 내린 1만3965.49에 거래를 마치며 이틀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고공행진하던 증시에 영향을 준 것은 인플레이션 우려 속 연일 상승하고 있는 국채 금리로 보인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1% 선을 밑돌던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2월 17일 장중 1.3%까지 치솟았다. 투자자들이 향후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 인상 정책을 펼치고 기존 채권보다 더 높은 금리로 채권을 발행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채권을 처분하기 때문이다. 채권 금리는 채권 가격과 반대로 움직인다.

미 국채 금리 급등은 동반 랠리를 보이는 증시에 부담 요인이다. 안전자산인 미 채권의 기대수익률이 높아지면 주식의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 등 미국 이외 국가의 주식과 채권에 투자한 이들에게 안전한 미 국채는 투자 대안이 된다.


수확 기계가 밀밭을 가로지르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수확 기계가 밀밭을 가로지르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1
반도체·원자재·식품 가격 동반 슈퍼사이클?

미국의 대규모 경기 부양 기대감 속에서 달러화 가치 하락 리스크를 ‘헤지’하려는 투자자들이 몰려 원유, 구리, 곡물 등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국제 유가는 코로나19 사태 전보다 높은 배럴당 60달러를 돌파했고, 2월 17일 영국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구리 3개월 선물은 장중 한때 톤당 8400달러를 넘어선 가격으로 거래되며 약 9년 만에 최고가를 기록했다.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러시아 RTS 지수, 중남미 칠레 IGPA 지수, 브라질 보베스파 지수 등 원자재 신흥국 주가 역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장기적으로 오르는 추세인 ‘슈퍼사이클’이 도래했다는 기대감이 상승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애그플레이션으로 비유되는 식품 가격 급등과 겹쳐 인플레이션 우려를 키우고 있다. 밀과 옥수수 등 주요 곡물은 2012년 미국의 대가뭄 때 가격이 폭등한 이후 8년 만에 최고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서울 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서울 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연결 포인트 2
美 인플레에 한국 증시도? 아직 섣부른 우려

미국 국채 금리가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 공포가 한국 증시 약세장을 부르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2월 18일 코스피 지수는 외국인과 기관의 순매도 지속에 1% 넘게 하락하며 3100선이 붕괴됐다.

코스피 지수는 전날보다 47.07포인트(1.50%) 내린 3086.66에 거래를 마쳤다. 이날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1.99포인트(0.06%) 하락한 3131.74로 출발했다. 미국에서 기록적 한파에 국제 유가 상승세가 이어진 가운데 미국 인플레이션 우려에 낙폭이 확대된 것이다.

다만 아직 미 국채 금리 상승이 당장 국내 증시에 큰 충격을 줄 가능성은 작다는 관측이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있으나 온건한 통화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연준이 긴급히 긴축에 들어갈 가능성이 작다는 판단에서다. 전문가들은 대신 금리 및 물가 상승 기대감에 따른 경기 민감주에 관심을 늘리고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국가 부채는 물가에 큰 영향을 준다. 사진 블룸버그
국가 부채는 물가에 큰 영향을 준다. 사진 블룸버그

연결 포인트 3
인플레는 빈부 격차 확대 디플레는 부채 위기 심화

전세계가 코로나19 여파로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내놓으면서 각국의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가 늘어나고 있다. ‘나랏빚 증가 속도’가 빨라지면서 영국·캐나다 등 국제통화기금(IMF) 기준 선진국 20개국 중 10개국의 국가신용등급 및 전망이 내려갔다. 재정 적자와 부채 확대는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우려를 모두 키운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과도하게 많은 자금을 시장으로 유입시키는 경우, 코로나19 종식 때 보복 소비 심리가 폭발하면서 과도한 물가 상승 압력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부유층의 자산 가치는 올라가고 저소득층의 부채부담은 증가하면서 코로나19로 커진 빈부 격차가 더욱 심화될 우려가 있다. 반면 정부의 부양책에도 노동 시장이 붕괴되고 실제 가계 소비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지속적인 상품·서비스 가격 하락을 가져올 수 있다. 이 경우 과다한 부채와 디플레이션이 만나면 불황으로 이어지는 부채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진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