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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 현 한국은행 외환자산 운용위원회 외부위원, 투자전략 부문 최다 베스트 애널리스트 수상
이경수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
현 한국은행 외환자산 운용위원회 외부위원, 투자전략 부문 최다 베스트 애널리스트 수상

국제 전략가 Z. 브레진스키 교수는 미국의 국제 정치를 ‘거대한 체스판’에 비유한다. 미국 중심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체스판 위의 패를 움직이듯 전략적인 선택을 취한다는 의미다. 현재 그 체스판에 도전하는 국가는 중국이 아닐까 싶다. 경제 규모 면에서 향후 미국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자, 제국(Great Empire)의 순환론 관점에서 보면 유력한 후보임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6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등 국가, 제국의 역사는 100~200년 주기로 바뀌어 왔다. 16세기는 중국, 18세기는 네덜란드, 19세기는 영국이 1등 국가였다. 20세기 이후로는 지금의 미국이 그 위치에 있다. 순환적 교체론을 믿는 사람들은 미국 다음의 패권 국가로 중국을 지목한다.

국가 패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자연스러운 주도권 교체’는 없었다는 점이다. 불황, 혁명, 전쟁을 비롯한 대혼란과 국가 간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갈등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다. 10~20년에 걸친 국가 간 견제와 갈등 역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미국과 중국 간 갈등도 예고된 힘겨루기다.

투자 세계에서 국가 간 파워 게임(power game)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국가 분쟁이 산업의 변곡점으로도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툼의 영역도 진화한다. 갈등 초기에는 특정 산업에 대한 무역 분쟁으로 시작하지만 후반부에는 핵심 기술 전반의 경쟁으로 확산한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는 시기라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무역 분쟁이 경제 규모의 싸움이라면 기술 분쟁은 ‘기술 표준’의 주도권 경쟁이다. 기술의 혁신을 주도하는 국가가 승자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985~94년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분쟁이 대표적이다. 당시 기술력의 대명사인 일본이 미국과 반도체 경쟁에서 뒤처진 배경은 역설적으로 이른바 ‘갈라파고스화’라 일컫는 기술 고립이 원인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견제와 규제를 피해 자국 내 기술의 고도화에 집중했고, 내수화에 치중하면서 정작 세계의 기술 표준을 주도하지 못했다. 골든 타임을 놓친 셈이다. 1990년대 세계시장을 장악했던 소니의 워크맨, DVD플레이어와 같은 명성을 지금은 찾기 어렵지 않은가.

반면 미국은 반도체 생산이 아닌 설계 중심으로 산업의 중심축을 전환하며 PC와 인터넷 산업의 성장을 주도했다. 가장 핵심적인 기술은 미국이 주도하고 주변 기술은 모듈화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플랫폼 전략의 시초다. 반도체 생산이 아닌 반도체 설계의 인텔로, 윈도 OS 플랫폼의 절대 강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 방식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강대국 간 경쟁은 ‘풍선효과’를 유발한다. 무역이 아닌 기술 분쟁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주변국에 의도치 않은 수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분쟁으로 한국과 대만이 대표적인 수혜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반도체 설계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전환한 대신 한국과 대만은 반도체 생산 기지로서 입지를 얻었다. K반도체의 변곡점이었던 셈이다.

1960년대 미국과 유럽 간 무역 분쟁이었던 ‘치킨 전쟁’도 풍선효과를 유발했다. 치킨 전쟁은 미국이 유럽에 대한 보복관세의 일환으로 유럽으로부터 수입되는 소형트럭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미국과 유럽 간 다툼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일본 자동차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결국 일본의 자동차 산업이 다시 미국의 견제를 받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미국과 중국의 기술 분쟁을 보는 관점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기술 굴기’ 선언으로 본격화된 이후 분쟁 양상은 더욱 격화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을 보면 중국은 미국의 견제에 대응에 자국의 첨단산업 자체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미국은 주도권 유지를 위해 동맹국을 통한 견제에 나서는 모양새다. 중국은 이번 ‘14차 5개년 계획’의 산업 정책에서 총량 목표인 국내총생산(GDP) 성장 목표 대신 연구개발(R&D) 투자 목표(2025년까지 전국 R&D 연평균 지출 증가율 7% 이상)를 설정했다. 그만큼 ‘기술 자립’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미국의 견제가 심하다는 의미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기술 견제를 두고 ‘차보즈(卡脖子·두 손으로 목을 조른다)’라는 단어가 고유명사처럼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과거 기술 고립을 자초했던 일본 그리고 일본을 견제했던 미국의 방식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상이 반도체 등 일부 정보기술(IT) 제품만이 아닌 ‘데이터(data)’와 관련된 모든 산업이 될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반도체·전기차·바이오·조선 주목

이제 우리는 투자의 관점에서 어떤 것을 예상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직 미·중 간 기술 분쟁의 최종적인 승패를 예단하기 어렵지만 양국 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관련 산업의 지형은 빠르게 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기술 자립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 기술 산업에 새롭게 개척 혹은 침투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질 듯하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명료해진다. 풍선효과 관점에서 미국의 기술 공급망에 강점이 있는 기업에 투자하거나, 양국 간 경쟁과 상관없이 압도적인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국내 반도체, 전기차(+이차전지), 바이오 위탁생산(CMO), 조선은 미국 공급망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거나 전 세계에서 과점적 지위를 가진 산업이다. 향후 미·중 간 기술 경쟁이 격화될수록 오히려 이들 산업의 공급망 협업이 강화되거나 강대국 간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산업이다.

대항해 시대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는 ‘무역’이 중심이 되는 열강의 다툼이었다면, 지금은 ‘기술’에 기반한 주도권 경쟁 시대다. 기술에 종속되는 기술 식민지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술 주도권에 대한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 주도권 확보에 성공할 경우 장기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지만 실패할 경우 그 대가가 혹독하다. 국가도 기업도 마찬가지다.

투자의 관점에서 투자자는 기술에 종속되는 기업보다는 기술을 주도하는 기업을 찾고 여기에 투자를 집중하는 것이 항상 옳은 전략이다. 그런 기업들이 거대한 ‘체스판’을 움직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