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위븐 호주 라트로브대 경제학과, 호주 인프라 사업청, 인더스트리수퍼홀딩스 회장
게리 위븐
호주 라트로브대 경제학과, 호주 인프라 사업청, 인더스트리수퍼홀딩스 회장

지난해 국내 퇴직연금 적립 규모는 190조원이었다. 퇴직연금은 기업이 노동자에게 줘야 할 퇴직금을 금융회사에 맡겨 운용해 퇴직 후에 이를 매달 연금 형태로 돌려주는 제도다. 지난해 연 수익률은 1.01%로 한국은행 기준금리(1.5%)보다도 낮다.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지 않고 은행 예금 등 원금이 보장되는 낮은 금리의 상품에 전체 적립액의 대부분(90.3%)을 넣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5년간(2014~2018년) 평균 수익률은 1.88%에 그쳤다.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어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제도는 호주의 퇴직연금 제도인 ‘수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기금형 퇴직연금)’이다. 이 제도는 개별 기업이 각자 자산운용사와 계약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같은 산업에 속한 기업들이 함께 퇴직연금을 모아 기금을 만들고 이를 별도의 수탁 법인에 맡기는 방식이다. 수탁 법인은 성과가 좋은 자산운용사와 계약해 퇴직연금을 관리한다. 기업의 정규직원뿐 아니라 아르바이트생 등 단기 노동자도 가입할 수 있다. 건설업 노동자들이 가입하는 ‘시버스수퍼’ 등이 대표적인 기금이다. 개별 회사의 퇴직연금보다 훨씬 큰 규모의 기금이 형성되면서 대규모 인프라(사회기반시설)에도 투자할 수 있다.

호주는 1992년부터 수퍼애뉴에이션을 운용했다. 수퍼애뉴에이션 기금 중 가장 규모가 큰 산업형 펀드(Industry Superannuation funds)의 1년 수익률은 7.09%(2018년 7월~2019년 6월 기준)다.

‘이코노미조선’은 수퍼애뉴에이션 도입에 핵심 역할을 한 게리 위븐(70) IFM인베스터스 설립자를 만나 한국 퇴직연금 제도 개선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1990년 자산운용사 IFM인베스터스를 설립했다. 현재 운용 자산은 1110억호주달러(약 89조원)로 운용 자산 기준으로 호주 1위, 세계 3위의 인프라 전문 자산운용사로 성장했다.

게리 위븐 설립자는 호주 정부에 수퍼애뉴에이션 도입을 건의해 정치권과 기업, 노동자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주 언론은 그를 ‘수퍼애뉴에이션의 창시자(godfather)’로 부른다.

9월 6일 금융투자협회가 주관한 ‘한국-호주 퇴직연금 포럼’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 방한한 게리 위븐 설립자를 서울 광화문 서울파이낸스센터(SFC)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도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도로, 공항 등 인프라 자산에 대한 투자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너무 많은 자산운용사가 퇴직연금을 운용하도록 허용하면 오히려 노동자와 기업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며 자산운용사를 잘 선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호주에서 기금형 퇴직연금인 수퍼애뉴에이션을 도입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이 퇴직연금에 가입해 은퇴 후에 매달 일정 금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수퍼애뉴에이션을 도입하기 전에는 노동자 중 퇴직연금에 가입돼 있는 사람이 채 40%도 안 됐다. 가입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연금에 가입한 이후에도 실제 연금을 받기 위해선 단일 고용주(회사)에게 오랫동안 고용돼 있어야 했다. 고위 공무원으로 퇴직한 사람이나 회사 임원급 또는 장기 근속자로 퇴직한 사람들만 연금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비정규직 등) 더 많은 노동자가 연금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수퍼애뉴에이션을 도입했다.”

수퍼애뉴에이션은 1992년 도입됐는데 월 450호주달러(약 36만6000원) 이상 버는 노동자는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아르바이트생, 연예인, 운동 선수도 가입 대상이다.

지난해 수익률이 7%가 넘는다. 저금리 시대에도 수익률이 높은 이유는.
“인프라 투자 등 다양한 글로벌 자산에 투자한 게 성공적이었다. 인프라 투자는 주식처럼 원할 때 바로 현금으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IFM인베스터스가 운용한 퇴직연금 통계를 보면 지난 23년간 호주 국내 인프라 자산에서 연평균 14%의 수익을 얻었고 해외 인프라 자산에서는 연평균 10% 정도의 수익을 얻었다.”

게리 위븐 설립자가 말한 인프라 투자는 공항·철도·도로·항만 등을 건설할 때 건설 자금을 투자한 후 수십 년간 이용료 등을 통해 수익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호주의 매쿼리 그룹이 인프라 자산에 투자하는 대표적 금융그룹이다.

인프라 투자의 위험도는.
“인프라 자산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자산 가치의 변동성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호주 자산운용사들이 인프라 자산에 적극 투자하는 것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변동성을 줄이기 위한 이유가 더 크다. 변동성이란 자산 가격이 급격히 오르내리는 현상인데, 주식시장이 대표적으로 변동성이 큰 시장이다. 변동성이 낮으면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 인프라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기금형 퇴직연금이 인프라 자산에 투자할 때 유리한 점이 있나.
“두 가지가 유리하다. 우선 기금형 퇴직연금은 개별 퇴직연금이나 일반 펀드보다 대규모 자금을 모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프라 건설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그만큼 투자 금액도 커야 한다. 대부분의 펀드는 이런 자금을 댈 여력이 없다. 기금형 퇴직연금 등 대형 연기금만 참여할 수 있는 시장인 셈이다. 그만큼 좋은 인프라 자산 투자에 대한 경쟁이 심하지 않아 투자 기회를 얻기가 쉽다. 또 퇴직연금이 퇴직 시 일시금으로 지급되지 않고 조금씩 분할해서 지급하는 상품이라는 점도 인프라 자산 투자에 적합하다. 한 번에 적립금을 모두 줘야 한다면 주식처럼 현금화하기 쉬운 자산에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매달 나눠 지급하는 경우에는 인프라 자산에서 얻는 수익금으로 지급해도 된다.”

한국도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하려고 한다. 한국 정부에 조언한다면.
“너무 많은 자산운용사가 퇴직연금을 맡도록 허용하지 않는 게 좋다. 오히려 노동자와 기업은 혼란스러워한다. 또 자산운용사를 이리저리 갈아타다 보면 장기 투자를 하지 못하게 된다. 장기 투자를 못 하면 결국 투자 수익률이 떨어진다.”

호주는 노사관계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인 페어워크커미션(Fair Work Commission)에서 투자 자산의 종류와 투자 전략 등을 분석해 퇴직연금을 맡겨도 된다고 판단한 자산운용사만 퇴직연금을 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은행, 증권사, 보험사가 퇴직연금을 운용할 수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수년째 도입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아직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다. 정부는 지난해 4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위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을 운용할 자산운용사에 조언한다면.
“성공적으로 기금형 퇴직연금을 운용하려면 투자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려고 하지 말아라.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 인프라 등 어떤 자산에 투자한다고 해도 대부분 운용사는 자산 가격 상승에 맞춰 투자하려고 타이밍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타이밍을 맞추려는 자세로는 성공적인 자산 운용을 할 수 없다. 한두 번은 타이밍을 맞춰 투자할 수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시장의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기적인 타이밍만 보지 말고 자산 가격이 변동해도 꾸준히 수익이 날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짜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