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우 메인스트리트인베스트먼트 대표 전 한빛소프트 해외마케팅 상무, 전 더나인 부사장, 전 알리바바 게임담당 총괄이사, 전 LB인베스트먼트 중국법인 대표
박순우
메인스트리트인베스트먼트 대표 전 한빛소프트 해외마케팅 상무, 전 더나인 부사장, 전 알리바바 게임담당 총괄이사, 전 LB인베스트먼트 중국법인 대표

첨단기술 시대지만 1차 산업인 농업의 위상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특히 기술로 농업 분야의 혁신을 주도하는 애그테크(agtech·농업 분야 첨단기술) 스타트업에 대한 주목도가 높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농업과 빅데이터를 접목한 ‘파머스 비즈니스 네트워크(FBN·Farmers Business Network)’가 있다. FBN은 농업 데이터 시장에서 새바람을 일으키며, ‘농업계의 구글’ ‘농민을 위한 아마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FBN은 구글 출신 엔지니어인 찰스 배런,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캐피털 투자자였던 에멀 데슈페인드가 2014년 공동 창업한 기업이다. 구글에서 대체에너지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던 찰스 배런은 농가에서 일하던 처남에게서 농가의 현황을 듣고 농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정보의 빅데이터화가 더디고, 투명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바꾸기 위해 농부들을 위한 디지털 팜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FBN은 농민들끼리 종자 정보, 산출량, 재배 노하우 등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정보 공유 플랫폼 서비스로 출발했다. 가입자는 자기 농장의 토양 상태, 종자·비료 브랜드와 가격, 작황 등을 입력하면 가입한 다른 농장의 정보를 함께 보며 농사에 참고할 수 있다. 농가는 700달러의 연회비를 내면 언제 농산물을 수확하면 좋을지, 토지에 맞는 농작물은 무엇일지 등 근본적인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부터 날씨 분석, 마케팅 수단 등 다양한 정보 확보까지 할 수 있다.

FBN은 가입자에게 종자와 토양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종자를 추천하는 서비스 ‘Seed Finder’를 제공한다. 농부들이 자신의 토양에 적합한 종자를 찾기 힘들다는 점에 주목했다. 공급사마다 종자 종류가 천차만별이고, 토양의 성질에 따라 적합한 종자가 무엇인지 정보가 부족했다. 비슷한 종자라도 브랜드에 따라 가격이 상당히 차이가 나기 일쑤였다. 농부들은 주변의 조언이나 직관에 따라 종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만의 농법을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하기 전에는 생산성도 낮고, 생산량 또한 일정하지 못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코첼라의 한 농장. 사진 블룸버그
미국 캘리포니아주 코첼라의 한 농장. 사진 블룸버그

농부들은 FBN의 서비스를 통해 다른 농부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유사한 토양에서 어떤 작물이 가장 잘 자라는지 알 수 있게 됐다. 110개 브랜드의 1800종 이상의 종자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다른 농장을 벤치마킹해 자신의 농장과 비교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다른 농장은 이 비료를 얼마에 구매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유통 가격과 자신이 구매한 가격을 비교할 수 있게 됐다. 정보 접근성이 높아지고 다른 농가의 구매 가격을 알게 되면서 종자·비료의 가격 협상을 할 수 있게 됐다.

찰스 배런은 정보를 민주화하고 편견 없는 분석을 제공해 농부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중점을 뒀다. 또 소규모 농가가 대기업과의 거래에서 협상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그는 2019년 12월 2700명의 농부 앞에서 “대기업이 종종 씨앗과 제초제를 과도하게 높은 가격에 판매해 왔다”며 “여러분들이 통제권을 가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농가는 FBN을 활용해 다른 농가와 활발하게 소통할 수도 있다. FBN이 농부들의 네트워킹 플랫폼이자 커뮤니티를 만들어준 덕분이다. 농부들은 네트워킹 플랫폼에 농사일지를 공유하고, 콘텐츠를 올린다. 서로를 팔로하면서 정보를 교류하기도 한다. 농부들은 일방적인 재배 처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정보를 찾고 생산성을 높이게 된다.


농부들은 휴대전화나 컴퓨터로 농장 정보를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위성 이미지, 생산량 데이터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사진 블룸버그·FBN
농부들은 휴대전화나 컴퓨터로 농장 정보를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위성 이미지, 생산량 데이터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사진 블룸버그·FBN

FBN은 농자재 ‘이커머스 마켓플레이스’까지 만들어 농사에 필요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농부들은 FBN을 통해 합리적인 가격에 농자재를 구매할 수 있다. 자신이 키우는 품종에 적합한 다양한 농약과 그 농약의 성분 및 효능, 사용 방법 등을 한 번에 볼 수 있고, 비용 절약 방안을 추천받을 수 있다. 농자재를 주문하면 2~4일 안에 배송받을 수 있다.

FBN은 최근 대다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한편, 농업 특화 금융 서비스도 제공한다. 농장의 운영 자금, 농지 매입 자금, 농기계 구매를 위한 대출 관련 상품, 임대 상품도 데이터에 근거해 폭 넓게 제공한다. 농업에 특화된 맞춤형 보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농가와 가족, 직원들의 의료보험을 기존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하고, 작물과 농장에 대한 다양한 보험상품도 제공한다.

FBN의 회원 농가는 2016년 2500여 개에서 1만4000여 개까지 늘었다. 각 농가의 면적을 합치면 약 16만㎢(약 4000만 에이커)에 달한다.

상황이 이러하자 자본시장에서도 FBN의 비전과 가능성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캐피털 클라이너 퍼킨스는 2014년 4월 560만달러를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총 7회 투자에 참여했다. 구글벤처스도 FBN에 6차례 투자하는 등 강한 신뢰로 회사의 성장을 견인해 왔다.

FBN은 2020년 8월에 약 2조원의 기업 가치로 약 2억5000만달러(약 2800억원)의 시리즈 F투자를 유치했다. FBN은 설립 후 총 8차례의 기관 투자 라운드를 통해 15개의 투자기관으로부터 5억7000만달러(약 6500억원)의 누적 투자를 유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농업 유니콘의 등장에 기존의 농업 대기업인 독일의 바이엘(Bayer), 코르테바(Corteva), 신젠타(Syngenta) 등은 견제구를 던지고 있다. FBN의 마켓플레이스에 자사 제품을 제공하지 않는 등의 방법을 동원한다. 뿐만 아니라 FBN의 목표가 농업 데이터를 수집하고 농부들 모르게 판매하는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고 있다. FBN은 “FBN에 상품을 납품하지 않는 건 독과점의 횡포” “데이터를 다른 회사에 판매하지 않는다” 등을 외치고 있다.

FBN은 농민을 위한 아마존을 표방하고 값싸게 농자재를 제공하고, 데이터를 활용한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농민들을 돕고자 하는 사명 아래 출범한 FBN은 앞으로 기존 농업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어 갈 수 있을까. 또 기존 기업들은 어떠한 혁신을 하면서 FBN에 대응할까. 농업 산업의 지형이 어떻게 바뀔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