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부영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전 넷밸류 코리아 한국지사장, ‘마케터의 생각법’ ‘레인메이커’ 저자
황부영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전 넷밸류 코리아 한국지사장, ‘마케터의 생각법’ ‘레인메이커’ 저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사람의 이름은 지명도를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확장돼서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래 어떤 사람의 이름이었던 것이 보통 명사로 쓰이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고유 명사가 보통 명사가 되는 것, 사람의 이름이 물건이나 장소, 이론의 이름으로 쓰이게 되는 것을 ‘에포님(eponym)’이라고 한다.

에포님은 우리가 자주 쓰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18세기 말 미국 버지니아의 순회 치안판사 찰스 린치는 적법 절차도 거치지 않고 용의자를 바로 처형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이름은 ‘불법적이고 잔인한 형벌이나 폭력’이란 뜻의 ‘린치(lynch)’로 영원히 남았다. 포르투갈에 외교사절로 다녀오면서 담배를 들여와 프랑스에서 유행시켰던 장 니코의 이름은 ‘니코틴(nicotine)’의 어원이 됐다. 먹거리를 끼워 만든 빵을 즐기던 영국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은 ‘샌드위치(sandwich)’로 남았다.

섭씨와 화씨도 에포님이다. 물이 어는 온도에서 끓는 온도를 0에서 100으로 설정한 온도 이론을 제안한 스웨덴 물리학자 셀시우스(Celsius)의 이름은 ℃로 남았다. 셀시우스의 한자 표기는 섭이사(攝爾思)로, ‘섭씨(攝氏)’가 나왔다. 마찬가지로 화씨는 독일의 물리학자 파렌하이트(Fahrenheit)의 중국식 음역인 화륜해(華倫海)에서 나왔다. ℉로 표기하고 우리는 화씨(華氏)라고 읽는다.

호치키스처럼 상품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영광스럽게 남은 사례도 있다. 손바느질로 만든 봉제 곰 인형, ‘테디 베어’가 그 예다. 테디 베어는 미국의 제26대 대통령(1901~09년)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애칭 테디(Teddy)에서 비롯됐다. 사냥에서 곰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대통령에게 보좌관들이 새끼 곰을 산 채로 잡아다 사냥한 것처럼 총을 쏘라고 하자 이를 거절했다는 일화가 미국 전역에 퍼졌다. 루스벨트의 이야기는 한 신문사에서 풍자만화로 실으며 더욱 유명해졌다. 브루클린에서 장난감 장사를 하던 모리스 미첨이 여기에 착안해 풍자만화와 곰 인형을 나란히 진열해 놓고 곰 인형에 ‘테디스 베어(Teddy’s Bear)’라 이름 붙였다. 비슷한 시기, 독일의 재봉사 슈타이프도 풍자만화를 보고서 1904년에 테디 베어를 선보였다. 슈타이프는 휠체어 신세를 지는 소아마비 환자였는데 소아마비로 고생한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공통점으로 부각되면서 그가 만든 테디 베어는 더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국력을 신장시킨 루스벨트 대통령은 테디 베어 덕분에 더욱 많은 이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으로 남게 됐다.

고어텍스(Gore-tex)도 비슷한 경우다. 고어텍스는 듀퐁의 윌버트 고어가 1976년 첨단 의류 소재를 개발해 붙은 이름이지만, 이제는 통기성과 방수성을 지닌 의류 소재 전체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옷을 사러 갔을 때 고어텍스라는 표시가 붙어있으면, 고기능의 고가 제품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에포님 브랜드로 꼭 실존 인물의 이름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롯데라는 이름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샤를로트(Charlotte)’에서 탄생했다. 중국의 알리바바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착하고 똑똑한 알리바바가 부자가 되어 사람들을 돕는다’는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 마윈 회장이 선택했다고 한다.


테디 베어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애칭 테디(Teddy)에서 비롯됐다. 테디 베어는 전 세계인이 곰 인형을 부르는 단어가 됐다. 사진 블룸버그
테디 베어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애칭 테디(Teddy)에서 비롯됐다. 테디 베어는 전 세계인이 곰 인형을 부르는 단어가 됐다. 사진 블룸버그
스타벅스의 이름은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 이름을 본떴다. 영화 모비딕 포스터(왼쪽). 사진 IMDB
스타벅스의 이름은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 이름을 본떴다. 영화 모비딕 포스터(왼쪽). 사진 IMDB

호주의 코스메틱 브랜드 ‘이솝(Aesop)’은 ‘이솝 우화’의 작가 이름이다. 이솝의 그리스 이름은 아이소포스지만, 영어로는 ‘Aesop’이라고 쓴다. 창립자 파피티스로 단순한 이야기 구조와 은유로 쓰인 이솝 우화처럼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효능이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브랜드 네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스타벅스도 에포님 브랜드 중 하나다.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소설 ‘모비딕’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원래는 모비딕에 나오는 포경선 이름인 ‘피크워드(Pequod)’를 가게 이름으로 쓰려고 했으나 부정적으로 연상될 수 있어 포기했다. 피크워드가 자칫하면 ‘오줌(pee)’과 ‘형무소(quod)’를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슐츠는 결국 모비딕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 이름을 따서 브랜드를 만들었다. 일등 항해사의 이름은 스타벅(Starbuck)으로, 거기에 ‘s’만 붙였다.

좋은 에포님 브랜드의 조건을 이솝과 스타벅스의 사례가 말해준다. 성공적인 에포님 브랜드는 우선 부정 연상이 없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활용하려는 이름이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 그리고 상징성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이름이 주는 의미가 그 이름을 쓰는 기업의 업의 개념이나 철학과 연계성이 있다고 지각되면 대성공이다.

물론 좋은 뜻을 담은 에포님 브랜드명을 선보이고도 걸맞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벨기에의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GODIVA)는 11세기 영국 코번트리 지역 영주의 부인인 ‘레이디 고디바’의 이름에서 따왔다. 당시 지역 영주인 남편이 마을 사람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보다 못한 레이디 고디바는 남편에게 세금을 감면해줄 것을 호소했다. 영주는 벌거벗고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세금을 감면해 주겠다는 인성의 밑바닥이 보이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레이디 고디바는 실제로 옷을 입지 않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고,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을 쓰는 고디바가 실제 기업 활동에서 이를 실천했다는 얘기는 별로 없다. 오히려 비싼 가격으로만 유명하다. 이 경우 고디바는 잘 지은 브랜드 네임일 뿐 성공적인 에포님 브랜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