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세계적으로 물가 상승률이 높은 국가든 낮은 국가든 별다른 변화가 없다.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기축통화국들은 막대한 양적완화(기준금리가 제로인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발권력으로 국채 등 자산을 매입해 시중에 통화 공급을 늘리는 것)에도 불구하고 물가 상승률이 낮은 수준이다. 반대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경제 위기에 빠진 국가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기를 쓰지만, 물가 상승률이 여전히 높다. 라인하트 교수는 엔화나 달러화 같은 안전자산에 대한 쏠림현상, 경제위기 국가의 화폐 가치 하락에 대한 불안감 등 환율 요인 때문에 물가에 대한 기대심리가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 물가에 대한 기대심리에 변화가 있으려면, 정부가 공공 부문의 임금 인상률을 현재의 물가 상승률 수준보다 크게 높이거나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려면 일본은 공공 부문 실질임금을 대폭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는 재정건전성을 악화한다는 우려를 낳는다. 반대로 아르헨티나는 공공 부문 실질임금을 대폭 낮춰야 하는데, 공공 부문 종사자의 반발 때문에 정치적으로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다. 라인하트 교수는 정부가 이런 선택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물가에 대한 기대심리가 바뀌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카르멘 라인하트(Carmen M. Reinhart)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 피터슨연구소 선임연구원, 베어스턴스 수석이코노미스트
카르멘 라인하트(Carmen M. Reinhart)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 피터슨연구소 선임연구원, 베어스턴스 수석이코노미스트

변하지 않는 물가 상승률이 각국 중앙은행을 혼란스럽게 한다. 중앙은행이 물가 상승을 유도하려고 노력하든 억제하려고 노력하든, 정책 결정자들은 실질적으로 같은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일본은 최근 20년 중 11년간 물가 하락을 경험했다. 2016년 이후 디플레이션 압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물가 상승률은 통화 확대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BOJ)의 물가 목표인 2% 아래에 머물러 있다. 일본은행은 2016년 이후 기준금리를 마이너스로 유지하고 있으며, 장기금리(10년 만기 국채금리) ‘0% 수준’을 유도하고 있다. 또 ① 2013년 이후 기록적인 국채 매입으로 통화량을 약 250% 늘렸다. 일본은행은 일본 국채 유통량의 약 50%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38%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같은 정책에도 불구하고 5년 후에 예상되는 인플레이션율은 여전히 1% 수준에서 변동 없다.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는 인플레이션과 싸움은 정반대 경우다. 아르헨티나중앙은행(BCRA)은 201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따라 본원통화를 늘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기준금리가 74%까지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물가 상승률은 1년 전의 26%에서 55%로 높아졌다. 물가가 크게 오른 것은 페소화 급락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 때문이다. 미 달러화 대비 페소화 가치는 올해 3월 말 기준으로 1년 전보다 115% 절하됐다.

그러나 환율과 물가는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과열된 경제가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아르헨티나는 깊고 오랜 경기침체와 싸우고 있다. IMF는 아르헨티나의 성장률이 지난해 -2.5%에 이어 올해 -1.2%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아르헨티나는 신용 경색, 통화 긴축, 물가 통제에도 불구하고 물가 상승률이 40%에 근접해 있다. 2016~2018년 마우리시오 마크리 행정부 아래에서 ② 물가안정목표제를 시행했지만 소용없었다. 2019년 물가 목표는 5±1.5%였지만 신뢰도가 문제였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1페소는 1달러에 거래됐다. 최근 1달러는 44페소 정도다. 통화 가치가 18년 만에 4000% 이상 절하한 것이다. 같은 기간 일본 엔화는 미 달러화 대비 12% 절상됐다. 가까운 미래에 엔화가 폭락하거나 페소화가 안정될 것이라고 추론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계 금융시장이 경색될 때, 미 달러화뿐 아니라 엔화나 스위스프랑화도 강세를 보였다. 예를 들면, 2008~2009년에 이들 통화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의 통화 가치가 폭락했다.

이 같은 환율 트렌드는 저축-소비 패턴과 자산 배분에서 엔화 선호 성향을 강화시킨다. 실질금리(명목금리에서 물가 상승률을 뺀 것)가 마이너스가 되기 전 일본에서는 이런 환율 트렌드(엔화 강세)로 인해 엔화 저축자들은 자산 가치 상승효과를 누렸다. 이 때문에 일본인은 국내 자산이나 엔화 표시 자산에 편중돼 있다. 엔화 표시 자산은 안전자산으로 가치가 떨어질 위험이 적고 글로벌 경제위기 때는 엔화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지폐. 사진 블룸버그
아르헨티나 페소화 지폐. 사진 블룸버그

아르헨티나의 경우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통화 가치 하락 때문에 가치 저장 수단으로 미 달러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공고해졌다. 2002년 1월 국내 은행에 있는 달러화 표시 예금과 대출을 페소화 표시로 강제 전환한 조치는 달러화의 국내 사용을 일시적으로 감소시켰을 뿐이다. 이런 인위적인 조치 때문에 예금 금리가 낮아졌고 적지 않은 개인 예금이 해외로 유출됐다. 해외 예금 규모가 크게 변화하면 환율 안정과 외채 조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중앙은행의 정책이 먹히지 않는 것으로 판명났을 때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본의 경우 민간 부문에서 앞으로 물가 상승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려면, 공공 부문 임금 상승률을 물가 상승률 수준에 맞추는 것을 깨야 한다. 공공 부문 임금을 과감하게 높이면, 민간 부문 임금과 물가도 함께 상승할 것이다.

국가 부채 비율이 높은 나라에서 그런 방법이 재정건전성을 위협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엔화 가치 절상 트렌드를 약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높은 물가 상승률은 ③ 가계 부채보다 과도한 공공 부문 부채에 대한 하나의 해법이 될 것이다. 물가 상승률이 높아지는 만큼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부채의 실질가치가 하락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가 상승률이 10%라면 부동산과 같은 실물자산 가치의 100원은 물가 상승분만큼 올라 110원이 되지만 명목자산인 부채 100원의 실질가치는 90원으로 떨어진다.

아르헨티나는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에 영향을 주고 물가 상승이 다시 임금 상승에 영향을 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공 부문 임금을 물가와 연동하지 말고 기존 명목 수치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면 공공 부문의 실질임금이 크게 하락할 것이다. 그러나 임금을 물가에 연동하지 않는, 즉 임금 상승률을 물가 상승률보다 낮게 하는 정책은 상황이 좋을 때도 정치적으로 매우 어렵다. 특히 아르헨티나처럼 공공 부문이 큰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또 선거가 있는 해에 이런 정책을 시행한 사례는 역사상 없을 것이다.

실질임금 하락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꺾을 수 있다. 또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쓰면 실질환율이 절상되고 그에 따라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데, 실질임금이 떨어지면 이런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높든 낮든 견고하게 유지되는 것은 대중이 또 다른 역사적인 트렌드로부터 배움을 얻기 때문이다. 정부는 어려운 선택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Tip

일본은행은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취임한 2013년 이후 양적완화를 시작했다. 2012년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 총리의 아베노믹스에 보조를 맞춘 것으로, 잃어버린 20년을 상징하는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겠다며 ‘물가 상승률 2%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물가는 목표치만큼 오르지 않았다. 양적완화 규모를 더 늘렸지만 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그러자 일본은행은 2016년 9월 새 통화 정책으로 단기금리를 마이너스까지 떨어뜨리고 장기금리 지표물인 10년 만기 국채 금리 ‘0% 수준’을 유도했다. 

중앙은행이 통화 정책의 목표를 물가 안정에 두고 특정 물가 목표를 설정한 뒤 각종 통화 정책 수단을 사용해 목표에 도달하려는 방식을 말한다. 1990년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캐나다·이스라엘·영국·호주·스웨덴·핀란드·스페인 등에서 채택하고 있다. 한국은 1997년 말 한국은행법을 개정하면서 1998년부터 물가안정목표제를 도입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물가 상승률이 너무 낮아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 우려가 부각됐다.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들은 물가 상승률이 1% 수준 또는 그 이하에 머물렀었다. 인플레이션 걱정이 없기 때문에 미국·유럽·일본은 대규모 양적완화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디플레이션 우려를 막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양적완화로 통화량을 대폭 늘렸다. 특히 일본은 양적완화를 통해 물가 상승률을 적극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국은 2016년 이후 물가 안정 목표가 2%인데 물가 상승률은 1%대에 그치고 있다.

일본 국가 부채는 GDP 대비 240%에 육박하지만, 가계 부채는 50%대다. 일본은 국가 부채 비율이 유럽 경제의 ‘문제아’인 그리스(182%)와 이탈리아(132%)보다도 크게 높다. 그런데도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외환보유액이 1조3000억달러에 달하고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 대부분을 일본은행과 국내 기관 투자가가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가 부채 비율은 40% 수준이지만 가계 부채 비율이 100%에 근접해 일본과 정반대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