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특히 산업에 바로 적용할 수준의 기술은 좋은 연구팀의 집단 연구를 통해 개발된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첨단기술, 특히 산업에 바로 적용할 수준의 기술은 좋은 연구팀의 집단 연구를 통해 개발된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김우창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김우창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신에게는 아직 5000만 국민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 한국 대표팀 선수단이 묵는 도쿄올림픽 선수촌 건물에 한동안 걸려있던 문구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고 한 이순신 장군의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대한체육회가 준비한 응원 문구에 일본 측은 관방장관까지 나서서 정치적 행위라 비판했고, 결국 우리 선수단 측은 다른 응원 문구로 교체해야만 했다. 도쿄올림픽 홈페이지에는 독도가 버젓이 일본 영토로 표기되어 있고, 경기장 내 욱일기 응원 역시 허용된 상황에서 일본 측의 트집에 기분 나쁘지 않았을 국민이 있을까. 하지만 학자이자 엔지니어인 필자가 도쿄올림픽 응원 문구 소동에서 울컥했던 지점은 다른 국민과는 약간 달랐을 것 같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우리나라 상황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20세기 후반부터 중국을 미래의 파트너로 점찍고 우호적인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세계 시장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중국의 급속한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성장은 중국 특유의 자국우선주의와 결합해 민주주의 기반의 서방 세계를 위협하게 된다. 결국 미국은 전략적 실패를 자인하고 중국과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경제력 축소 등의 중장기적 국가적 손실을 각오하고서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한시적 정책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조 바이든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초당적 협력을 바탕으로 중국에 대한 견제가 더욱 공고해지는 것을 보면 중국이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놓겠다는 미국의 결심은 꽤 오랜 기간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승리는 중국몽(夢)으로 대표되는 시진핑(習近平) 정권의 어젠다 분쇄를 넘어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의 종료를 의미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7월 1일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20세기 100년간의 국가적 굴욕의 역사를 넘어 “중화민족의, 중국 인민의, 중국 공산당의 위대한 영광”을 달성하자고 역설했다. 미국의 승리는 중국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미래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성장했지만, 아직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풀어내야 하는 중국에 공산당 독재 체제의 종말은 5호 16국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새로운 냉전체제로 들어가는 것은 명백하다. 미·중 간의 신냉전은 경제적인 것을 넘어 국가 차원의 생존 경쟁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신냉전의 총성이 가장 크게 울리는 곳은 기술 분야다. 중국의 최고 입법기구인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6월 10일 반(反)외국제재법을 통과시키고 즉시 시행키로 했다. 요지는 미국의 대(對)중국 제재에 동참하는 국가나 기업을 중국 정부가 보복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위 ‘중국 견제 패키지법’이라 불리는 미국혁신경쟁법(USICA)을 준비 중이다. 해당 패키지는 제재 효과 제고를 위해 동맹국과 공동으로 대중국 수출 통제 및 수입 금지 필요성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밖에 없다. 중국의 보복을 감수하고 미국의 대중국 제재에 참여하거나, 미국과 관계 악화를 각오하고 중국 편에 서거나. 어떤 선택이든 우리는 큰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강요된 선택 앞에서 우리가 피해를 줄이는 방법은 기술력의 초격차 확보밖에 없다. 우리만 보유하고 있는 선도 기술은 우리에게 숨 쉴 공간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첨단기술 학문에서도 강요된 양자택일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녹록지 않다. 첨단기술, 특히 산업에 바로 적용할 수준의 기술은 개인이 아닌 집단 연구를 통해 개발된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좋은 연구팀의 구성이 필수다. 하지만 카이스트와 같은 정부산하 기관은 공공기관의 블라인드 채용 원칙에 따라 출신 대학도 지도교수도 모른 채로 연구인력을 깜깜이로 선발해야 한다.

물론 올림픽 9연패를 한 여자 양궁처럼 명확한 기준을 두고 그 사람의 배경과 관계없이 경쟁을 통해 최고의 인재를 뽑으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연구, 특히 첨단기술 분야는 정형화된 평가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과녁이 어디 있는지, 아니 우리가 뭘 쏘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연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원자의 모든 경력과 업적 정보뿐 아니라 주변 연구자들의 평가서까지 함께 보는 것이 연구자를 선발하는 국제 표준이다. 블라인드 채용 원칙은 본질적으로 연구자 능력 평가에 필수적인 정보를 볼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연구교수나 박사후과정 선발에는 활용부서장이 심사에 참여할 수 없다. 후보자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더라도 해당 분야 전문가인 활용부서장이 직접 선발에 참여한다면 적합한 인재를 뽑을 가능성이 있다. 전문성이 덜한 타인이 선발하게 되면 그 가능성이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좋은 연구팀을 꾸리는 것이 연구 자체보다 어려워졌다.

또한 공공기관은 2년 이상 근무하면 정년을 보장받는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따른다. 역설적으로 이는 박사후과정들이 실질적으로는 한 기관에서 2년 동안만 연구할 수 있게 한다. 박사후과정 인건비 재원은 연구책임자의 연구비인데 이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신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2년 계약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카이스트에서 박사후과정은 2년 이상의 연구를 완주할 수 없다. 세금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사적 자금이 재원인 경우도 그렇다.

생명과학 분야의 경우 실험이 필수다. 따라서 통상 3년에서 5년가량 한곳에서 박사후과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감안하면 연구책임자뿐 아니라 박사후과정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제도다. 2년 안에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하므로, 본인의 커리어 관점에서는 너무 큰 리스크이기 때문이다. 역량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한국보다 해외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술이 개발되면 그 지식재산권은 오롯이 연구자가 속한 기관, 크게 보면 해당 국가에 귀속된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개발한 기술은 미국 것이고, 중국인이 한국에서 개발한 기술은 한국 것이다. 좋은 인력을 국내로 불러들이지 못할망정, 있는 인력마저 한국을 떠나게 하는 현실이다.

미국과 중국의 정면충돌은 이 땅에서 더 좋은 기술을 더 많이 개발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단순명료한 명제를 던졌다. 중국 인구는 우리의 30배이며, 중국 최고의 과학기술대학인 칭화대는 카이스트의 여섯 배 규모다. 어쩌면 열두 척의 배로 300여 척의 배를 당해 내야 했던 이순신 장군의 사례는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숙명일지도 모른다. 단군 이래 양으로 승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사치였다. 우리는 인재의 질과 집단의 짜임새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뛰어난 인재가 이 땅에 머무르도록, 그리고 이곳에서 결과를 내도록 해야 한다.

다시 열두 척의 배로 거대 함대에 맞서야 하는 시기, 국가의 명운을 건 기술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엄혹한 시대, 국가 생존에 필수적인 과업을 과연 지금의 제도는 허용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