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 광운대 경영학 박사, 무역협회 전 FTA 통상연구실장·전 베이징 지부장·전 동향분석실장·전 경영관리본부장
최용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 광운대 경영학 박사, 무역협회 전 FTA 통상연구실장·전 베이징 지부장·전 동향분석실장·전 경영관리본부장

최근 미국 텍사스 지역에 한파가 몰아쳐 400만 명 이상의 현지 주민들이 전기 공급 중단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갑자기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발전기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전기 공급 중단은 거의 모든 생산시설을 멈추게 하고 일상생활도 한순간에 처참한 수준으로 망가뜨린다. 일각에서는 에너지 전환에 따른 풍력 발전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이번 사태의 원인을 돌리고 있지만, 낮은 풍력 발전 비중을 고려하면 완전한 소명으로는 부족하다. 일상화되고 있는 이상기온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지적된다. 다만, 자연재해로만 그 탓을 돌리면 해결책 모색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글로벌 밸류체인, 효율에서 안정성 강화로

텍사스 정전사태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확산하는 글로벌 밸류체인(GVC⋅Global Value Chain) 재설계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해결 방안이 보다 쉽게 다가온다. 자연재해를 GVC와 연계하는 것은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일본 기업들은 2010년을 전후로 높은 법인세, 과중한 인건비 부담, 엄격한 환경규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지연 등 고비용 구조에 직면하자 해외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5년 전후로 해외 생산비율이 25%를 상회할 정도로 역사상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해외투자 촉진 요인이 있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현지 자동차 업계는 일부 부품 조달이 멈추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에 따라 자국 내에서 저렴하게 조달된다 하더라도 해외에 다른 공급선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불가피하게 국내에서 거래선 복수화를 도모할 경우 지역을 달리하고 호환 가능성을 먼저 고려했다.

지난해 코로나19 발생 초기 국내 자동차 업계가 와이어링 하네스(전선)라는 부품 1개 공급에 차질을 빚어 공장이 완전히 멈추는 사태를 겪었는데, 이는 거의 10년 전 일본이 겪었던 문제였다. 일본 제조기업들은 1~2개 부품의 부족만으로 모든 공정이 멈춘 것을 경험하면서 대량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복수화’라는 GVC 차원의 새로운 전략을 만들었다.

텍사스 정전사태는 기존에 신봉하던 기본적인 경영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 영하 20℃를 밑도는 강추위가 몰려와 1899년 이후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한 것이 발단이었다. 저온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발전소들은 발전기가 얼어붙어 작동 불능상태가 됐고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 논란의 중심에 선 풍력 발전기를 포함한 거의 모든 발전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이번 정전 문제의 핵심이 아니고 곁가지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코로나19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작동하는 비상 매뉴얼의 부재에 있다.


2월 18일 미국 텍사스주 와코에 있는 한 변전소. 최근 텍사스주는 기록적인 한파로 전기 공급이 중단됐고 생산시설이 가동을 멈췄다. 사진 AFP연합
2월 18일 미국 텍사스주 와코에 있는 한 변전소. 최근 텍사스주는 기록적인 한파로 전기 공급이 중단됐고 생산시설이 가동을 멈췄다. 사진 AFP연합

전력 분산 등 비상 매뉴얼 부재

더욱이 하나의 에너지원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가 문제를 키웠다. 텍사스주는 가정의 약 50%는 전기난방을, 40%는 천연가스 난방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 전력의 40%가 또다시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비상사태 리스크를 높였고, 사후에는 공급난을 부채질하면서 신속한 대안 마련이나 복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호환성이 낮은 전력망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텍사스주의 송전 네트워크는 여타 주들과 연계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설계됐다.

화석연료가 풍부한 이들 지역은 연방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자체 전력망을 갖췄고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가 주관하는 전력의 도매시장에도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FERC는 전력 인프라, 액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등에 대한 전문지식을 확보한 연방 차원의 전문기관이다. 텍사스주 전력공급 업체들은 대부분 지역 독점권을 확보하고 과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화석연료에 대한 공급량 증대책만 마련했을 뿐 다른 대체원료 확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리스크 관리에 필요한 전력 간 대체성 제고와 분산전략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은 2035년까지 전력 부문 탄소제로(Net Zero)에 도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풍력과 태양열 등 친환경 에너지원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과 함께 친환경 어젠다는 최우선 정책으로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재생에너지의 원활한 활용과 한파 등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송전망을 현재보다 50∼60% 늘려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눈을 돌려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해 에너지 전환의 성패가 조밀한 송전망 구축에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 생산량을 단기간에 대폭 늘리는 것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거미줄 같은 촘촘한 송전망 구축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특히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다양한 네트워크로 충분한 예비 에너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유럽연합(EU)은 단순히 한 국가 내 송전망 구축에 머물지 않고 국가 간에 에너지 송전 인프라를 연계해 에너지 안보 확보와 재생에너지 사용 증대를 동시에 도모하고 있다. 덴마크에서 생산된 풍력 전기는 스웨덴으로 공급되며, 벨기에에서 과잉 생산된 원자력 전기는 영국으로 보내진다. 미국과 국토 면적이 엇비슷한 중국은 지난해 재생에너지 전용 초고압선 전력망 구축에 35억달러(약 3조9000억원)를 투입했다.

향후 어느 나라건 기존 화석에너지와 재생에너지 간 관계 설정이 중요해 보인다.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와 환경 이슈가 부각된 화석에너지의 효율적 조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재생에너지의 경우 생산량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촘촘하게 송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잉여전력을 나눠주고 부족할 때 받을 방법에 대한 세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에 기업의 GVC 전략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첨단기술 접목한 디지털 시대 제조업

시장을 세분화하고 소비자별 특성에 맞는 작은 단위의 공장을 여러 개 만들어 고객 수요 변화에 실시간으로 대응하는 것이 디지털 시대 제조업 모델이다. 발전소도 소규모로 여러 개를 짓되 동시에 다양한 에너지원을 확보해야 한다. 만약의 사태로 기존 전기 공급선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곳에서 바로 대체할 수 있도록 상시적인 복수의 전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 인하보다 거래선 다원화로 리스크를 낮춰야 한다. 텍사스 정전 사태는 전력체계를 ‘효율’에서 ‘안정성’으로 재설계하는 것이 중요함을 부각시켰다.

조달선 복수화를 통해 경영의 안정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비용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 이런 부작용은 디지털 혁신으로 해결해야 한다. 산업용 사물인터넷(IoT)과 센서의 발전 그리고 3차원(3D) 프린팅 기술의 성숙은 개별 소비자에게 신속하고 저렴한 맞춤형 조달 및 공급체계를 갖추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농자재를 생산·판매하는 회사가 3D로 쉽게 신제품을 개발하고 정보기술(IT)을 활용해 농산물의 상태 및 기후 등을 고려해 적시에 알맞은 양의 농약과 비료를 생산하는 디지털 기업으로 변신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경쟁력의 원천을 상품의 원가나 물류비용이 아닌, 디지털 서비스로 확장하는 흐름에 전력체계도 올라타야 한다.

최용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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