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가와사키(川崎)에서 유명해지고 싶다면 살인 아니면 래퍼가 되는 길뿐”(‘가와사키 드리프트’ 가사 중)

12세에 돈을 훔치고 14세에 불량배가 돼 소년원을 들락거렸다. 온몸을 문신으로 감싼 일본의 8인조 힙합 그룹 배드 홉(BAD HOP)의 멤버들은 가사만큼이나 거친 삶을 살았다. 그들이 자란 거리, 일본 가와사키시 남부는 관동 일대에서도 치안이 흉흉하기로 악명이 높다. 이곳에서는 2015년 중학생 피살 사건, 2019년 사상자 19명이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졌다.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에 자리한 가와사키는 양극화가 극심한 도시다. 북부는 고층 맨션과 상업시설이 들어선 번화가다. 남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물자를 대기 위해 설립된 게이힌(京浜) 공업지대 일부가 자리했다. JFE스틸(구 일본강관), 후지쓰, 일본전기, 도시바의 대형 공장이 매연을 뿜어내 ‘일본에서 가장 공기가 나쁜 지역’으로 불린다. 전쟁 당시 일본강관에 강제 동원됐던 한국인 노동자 일부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이곳 이케가미쵸(池上町)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이 살던 막사가 무허가 건물로 모습을 바꿨다. 대부분이 과거 일본강관의 소유지이지만 권리반환 문제는 줄곧 고착 상태다.

배드 홉 멤버들은 빈곤과 범죄로 가득한 이케가미쵸 부근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2012년 전국 고교생 랩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T-파블로(Pablow·25)와 쌍둥이 동생 와이저(YZERR)가 주축이 돼 결성됐다. 홀어머니와 두 형제의 집에는 밤마다 빚을 받으러 온 야쿠자들이 흙발로 들이닥쳤다. 불량배가 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환경이었다. 가와사키에 이 형제를 전담하는 경찰 조직이 생겼을 정도였다. T-파블로는 중학생 때부터 2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린 갱단의 리더였다. 래퍼의 길을 걷기 위해 갱생의 의지를 다진 그는 대회 우승 후 악연을 끊기 위해 1년 반 동안 전국을 낭인처럼 떠돌았다.

그룹의 중심 멤버인 티지 조조(Tiji Jojo)는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다. 어릴 적부터 인근 북한 출신자들의 거주 지역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소년원에서 출소해 보육원 친구였던 T-파블로를 만나 배드 홉에 합류했다.

또 다른 멤버 G-키드(Kid)는 아버지가 야쿠자였다. 그 또한 소년원에 복역한 경험이 있다.

이들이 범죄와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음악에 대한 신념이었다. 대표곡 ‘체인 갱(Chain Gang)’에 흐르는 가사 ‘노래는 취미가 아니야. 이곳을 벗어나기 위한 무기’가 그들의 절규였다.

‘깨끗한 선진국’ 일본이 감추고 싶던 치부를 들춰낸 배드 홉의 적나라한 가사는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평화로운 일본’을 당연시하던 이들에게는 놀라움을, 과거의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불량 청소년들에게는 희망을 안겼다. 가와사키의 빈민촌은 이들을 영웅으로 여겼다.

일본인이 들어오면 돌을 던지던 외국인 거주 지역도 배드 홉의 뮤직비디오 촬영에는 흔쾌히 문을 열었다. 불량소년들이 모이던 공원에서는 패싸움 대신 랩을 연습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친구들은 다국적. 그럼에도 쇄국적인 잽(Jap·일본인을 비하하는 단어). 한국인·중국인·남미인 모두 연결돼 있어.”(‘Chain Gang’ 가사 중)

2015년 가와사키의 한국인을 노린 헤이트스피치 데모(인종혐오 집회)가 벌어지자, 이곳 시민들은 극우세력에 대항하는 시민연대 ‘크랙(CRACK·Counter-Racist Action Collective Kawasaki)’을 결성했다. 가와사키는 2019년 일본 최초로 헤이트스피치를 처벌하는 조례를 제정한 지역이다. 배경에는 이곳 특유의 다민족 간 유대의식이 있다.

재일활동가 고(故) 이인하 목사는 1973년 가와사키 사쿠라모토(桜本)에 민족, 종교와 관계없이 들어올 수 있는 보육원 세이큐샤(靑丘社)를 차렸다. 딸이 국적을 이유로 유치원에 가지 못한 차별 경험이 계기였다.

세이큐샤는 가와사키의 특징인 다문화 공생의 출발점이 됐다. 이곳에선 한국인, 일본인뿐 아니라 중국, 필리핀과 남미 출신 이민자의 자녀를 돌봤다. 이후 사회복지법인 인가를 받아 일본인과 재일 한국인이 공동으로 활용하는 사회교육시설 후레아이관(ふれあい館)을 열었다.

배드 홉의 멤버 바크(BARK)도 후레아이관을 다녔다. 그는 “래퍼가 되지 않았다면 보육사가 되고 싶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재일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경계가 뿌리 깊던 무렵부터, 어린 시절의 배드 홉 멤버들은 이곳을 오갔다. 가난은 서로를 묶어줬다. 이웃집 한국인이 그들의 냄비에 음식을 담아주기도 했다.


일본의 8인조 힙합 그룹 배드 홉(BAD HOP). 사진 배드 홉 공식 홈페이지
일본의 8인조 힙합 그룹 배드 홉(BAD HOP). 사진 배드 홉 공식 홈페이지

공업지대 소년범의 불규칙 바운드

배드 홉은 2018년 일본 가수들의 출세 등용문인 부도칸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같은 해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디젤과 협업해 헤이트스피치 반대 광고에 나섰다. 이듬해 발간된 가와사키 우범지대의 현실을 폭로한 책 ‘르포 가와사키(이소베 료 저)’에 배드 홉은 중심인물로 다뤄지며 유명세를 더했다. 이들은 가와사키 시장과 도시 개발 대담을 하는가 하면, 글로벌 미디어 ‘바이스(VICE)’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켄간 아수라’의 주제곡 ‘본 디스 웨이(Born This Way)’를 불러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았다.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이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지난 3월 개최 예정이던, 염원하던 요코하마 아리나 경기장 콘서트가 중단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배드 홉은 콘서트를 무관중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모두 팔려나간 1만7000석의 티켓을 환불하고 1억엔(약 11억원)의 적자를 떠안았다. T-파블로는 텅 빈 객석을 향해 “코로나19를 중국 탓이라며 비난하는 것은 가상의 적을 만들어 증오를 퍼붓는 것에 불과하다. 헤이트스피치를 멈춰라”고 외쳤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된 콘서트는 3만3000여 명이 실시간으로 관람했다. 관객 수용 수의 2배에 가까운 숫자다. 녹화 영상의 조회 수는 75만 건에 달했다. 대관료 빚을 갚기 위한 새 앨범의 선행예약 크라우드 펀딩에는 약 7800만엔의 자금이 몰렸다. 유튜브 수익과 홍보 효과를 고려하면 적자를 메우고도 남은 것이다.

배드 홉은 범죄의 고리에서 벗어나 랩으로 인생을 바꿨다. 폭력, 야쿠자, 인종차별, 매춘, 마약 거래, 양극화 같은 일본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출신지인 빈민가에 대한 사회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들의 행보에 일본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있다. 그룹명 배드 홉은 프로야구 용어로 불규칙 바운드를 뜻한다. 그들이 때린 공이 어디로 굴러갈지 지켜보면 폐쇄적인 일본 사회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