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본사. 사진 조선일보 DB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본사. 사진 조선일보 DB
김우창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편집장
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편집장

큰돈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된다. 돈을 운용하는 행위가 자본시장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공단은 올해 초 정부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700조원을 기금으로 보유하게 됐다.

국민연금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이다. 국민연금이 삼성그룹의 승계 문제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큰 힘이 있음을, 그리고 그 힘을 부정하게 활용하면 대통령도 삼성의 총수도 사법처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민연금은 거대한 기금을 바탕으로 우리 자본시장의 큰 권력이 됐다.

국민연금의 사회적 영향력만큼 기금 운용의 의사결정권자가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전주(錢主)’가 정부라면 정부가 직접 운용하고 책임을 지면 될 일이다. 500조원에 달하는 외환보유고가 좋은 예다. 외환보유고는 정부의 자산이기에 한국은행이 운용하는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국민연금기금은 정부의 자산이 아니다. 정부는 국민연금기금에 실질적으로 돈을 낸 바 없다. 또한, 기금 고갈 이후라도 약속된 연금을 지급해주겠다는 지급 보장 명문화 역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기금적립 기여도, 공식적인 지급 보장 책임도 없는 정부가 기금 운용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하기에는 명분이 약하다. 국민연금의 지배구조가 ‘전주’, 즉 사용자, 근로자, 지역가입자를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 시스템을 채택하게 된 이유다.

국민연금기금의 최상위 의사결정기구는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다. 기금위가 최고의결기구로서의 의사결정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 대표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이를 보좌하는 실무평가위원회(실평위)는 전문성에 좀 더 중점을 두고 구성돼 있다. 실평위 산하에는 투자정책 전문위원회,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 위험관리·성과보상 전문위원회가 있다. 실평위 위원들이 기금 관리 및 운용 전 분야에 걸친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기에 분야별로 전문가 9인으로 구성된 전문위원회를 꾸리고 각종 안건을 심의 및 검토한다. 기금운용본부는 기금위의 의사결정을 실행하는 역할을 한다.

기금의 규모가 크지 않았던 초기에는 위원회 시스템이 큰 문제 없이 잘 작동했다. 급하게 결정해야 할 일도 많지 않았고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이 자본시장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기금의 규모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국민연금의 사회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게 됐고 위원회 시스템 개선에 대한 목소리도 커졌다. 위원회 개최도 한 달에 1~2회 수준이었으며 모든 전문위원이 비상근직이라 개별 위원들이 오롯이 위원회 활동에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필자도 2016년부터 올해 초까지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 기금운용발전위원회 등 국민연금의 여러 위원회에 참여했다. 의결 안건이 있는 회의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등 나름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구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본업보다 국민연금 위원회 활동을 우선할 수는 없었다. 위원회에 대한 우려가 이상하지 않았던 이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연금은 올해 2월 상근전문위원제를 도입했다. 3년이 임기인 상근전문위원 3인은 3개의 전문위원회에 위원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며 위원회별로 위원장을 1년 동안 번갈아 가면서 수행하게 된다. 상근위원은 보좌 인력과 함께 기금운용본부의 운용 관련 정보에 대한 접근 역시 보장받는다. 상근위원들은 비록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위 의결권은 없지만, 안건에 대한 1차적 결정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유관 업계에서 상근전문위원직을 ‘자본시장의 절대 반지’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상근전문위원, 복지부 하부 조직된 모양

상근전문위원 독립성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본시장의 절대 권력인 국민연금기금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상근전문위원이 본인의 전문성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가 상근직 신설 계획을 밝혔던 지난해 10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기동민 의원조차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도 전문성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부의 과도한 개입력, 집중력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며 국민연금 거버넌스 체계를 우려했다.

이에 복지부는 상근전문위원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많은 신경을 쓰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우선 위원을 가입자 단체가 추천한 비공무원 신분으로 하고 기금위 위원처럼 차관급으로 위촉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상근전문위원은 다른 사람의 판단을 거치지 않고 기금운용위원장인 복지부 장관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상징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 원래 의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상근전문위원은 복지부의 하부 조직으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우선 애초 복지부가 밝힌 것과 달리 상근전문위원은 차관급이 아닌 기금운용본부의 실장급으로 격하됐다. 그 이유가 참 재밌다. 모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문위원회가 주무 부처인 복지부 연금정책국에 전달하고 복지부가 기금위 안건 상정 여부를 결정하는 현행 업무 시스템이 유지됐기에 상근전문위원을 차관급으로 하면 차관이 국장에게 보고하는 식의 모순이 발생하고 따라서 국장보다 낮은 실장급이 됐다”고 한다.

복지부와 상근전문위원의 상하 종속 관계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복지부 연금정책국장의 생각과 대치되는 상근전문위원의 의견이 복지부 장관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을까.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대표적 사례다.

그뿐이 아니다. 상근전문위원은 1회에 한해 계약 연장을 할 수 있다. 여기에도 복지부가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상근위원이 비공무원이기에 독립적이라는 복지부의 주장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근직 관련 사항 중 규정이 법이 아니라 시행령에 규정돼 있어 그 자격과 내용을 복지부가 임의로 바꿀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법적인 독립성이 담보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의사결정에 복지부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음을 납득할 수 있을까.

상근전문위원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만큼 지속적인 평가와 견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복지부의 하부구조가 돼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까지의 진행 상황은 전문성 제고를 명분으로 기금운용 권한을 복지부로 이전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국민연금은 사회적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행 상근전문위원제는 복지부에 소속돼 있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여지가 충분하다. 유관 기관들은 제도 보완에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