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거물급 연예인의 잇따른 마약 스캔들에 일본이 술렁이고 있다. 일본의 유명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沢尻エリカ·33)가 11월 16일 합성마약 메틸렌디옥시메스암페타민(MDMA·일명 ‘엑스터시’)을 소지한 혐의로 자택에서 체포됐다. 지난 3월에는 2인조 테크노 그룹 ‘덴키그루브(電気グルーヴ)’ 멤버이자 배우 피에르 타키(ピエール瀧·본명 타키 마사노리·52)가 코카인 흡입 혐의로 체포돼 충격을 안겼다.

지난 수년간 일본에서는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 고위 공무원을 중심으로 마약 소지 및 투약 적발 건수가 크게 늘었다. 2016년에는 프로야구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한 기요하라 가즈히로(清原和博)와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그룹 차게앤드아스카(CHAGE and ASKA) 멤버 ASKA가 잇달아 각성제 투약 혐의로 체포됐다. 이듬해엔 유명 기획사 쟈니스 사무소의 인기 아이돌그룹 캇툰(KAT-TUN) 전 멤버 다나카 코키(田中聖)가 대마초 소지 혐의로, 배우 하시즈메 료(橋爪遼)가 각성제 사용 혐의로 체포돼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최근에는 전(前) 국가대표 스노보더 고쿠보 카즈히로(國母和宏)가 대마초 소지로 체포됐다.

엘리트 공무원들의 마약 투약 적발도 늘고 있다. 올해 경제산업성 주요 부서인 제조산업국 자동차과에서 일하던 관료 니시다 데쓰야(西田哲也·28)가 각성제 사용으로, 문부과학성 초·중등교육국 참사관 보좌인 후쿠자와 미쓰히로(福沢光祐·44)가 필로폰과 대마초 소지로 체포됐다. 니시다는 도쿄 이케부쿠로의 길거리 밀매상에게서 구입한 마약을 직장 내 화장실과 회의실에서 투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저명인사 마약사범의 잇따른 검거 실적에는 일본의 특이한 단속 구조가 한몫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경시청 소속의 조직범죄대책 제5과 마약단속반 그리고 한국의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후생노동성 소속의 마약취체부(麻薬取締部)가 공존한다. 후생노동성 마약취체부는 경시청 소속이 아님에도 특별사법경찰로 분류돼 수갑과 권총을 소지하고 사복차림으로 함정수사를 펼친다. 마약취체부는 1980년 비틀스의 전 멤버 폴 매카트니를 대마초 소지 혐의로 나리타공항에서 체포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소다이(組対) 5과’와 ‘마토리(麻取)’로 불리는 두 부서는 치열한 경쟁 관계다. 한쪽에서 거물급 마약사범을 적발하면 다른 한쪽에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수사에 열을 올린다. 실제로 마토리가 3월 피에르 타키를 체포하자 소다이 5과는 사와지리 에리카의 마약 소지를 적발해 체면을 살렸다. 앞서 소다이 5과가 ‘프로야구의 전설’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체포하자 마토리는 ‘국민 가수’ ASKA 체포로 응수했다.

필요에 의해 수사공조를 벌이기도 한다. 2014년 일본을 휩쓴 ‘탈법(脫法)마약’ 박멸 작전을 통해 공동으로 집중 단속을 펼쳐 한때 일본 전국 215곳에 달하는 탈법마약 판매점을 폐쇄하는 실적을 올렸다.


마약 소지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왼쪽)와 마약 복용으로 2016년 유죄 판결을 받은 야구 선수 기요하라 가즈히로. 사진 공식 홈페이지 및 조선일보 DB
마약 소지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왼쪽)와 마약 복용으로 2016년 유죄 판결을 받은 야구 선수 기요하라 가즈히로. 사진 공식 홈페이지 및 조선일보 DB

세계대전 계기로 정착한 각성제

마약사범 유명인의 잇따른 체포는 일본 사회에 범람하는 마약 유통을 방증하는 지표다. 일본은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마약 대국’ 반열에 오른 적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진통제로 쓰이던 모르핀을 국산화했다. 전쟁 후 넘치던 재고가 조선으로 흘러들어 중독자를 낳았다. 대만 점령 시에는 아편을 전매해 막대한 이득을 올렸다. 와카야마현과 오사카 등 자국 내에서 양귀비를 재배해 ‘아편의 국산화’에도 공을 기울인 바 있다. 1935년 국제연맹(현 UN)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헤로인, 코카인 생산량은 세계 1위, 모르핀은 4위였다.

1940년에 들어서는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노동력과 전력 향상을 위해 대량의 각성제를 군수품으로 생산했다. 대일본제약이 ‘피로회복제’ 목적으로 생산한 ‘히로뽕’은 현재까지도 그 상품명이 마약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다. 현재도 일본을 대표하는 제약 회사로 남아있는 고바야시약품공업, 후지화학공업, 다케다약품공업도 각각 각성제를 생산했다. 사토 아키히로(佐藤哲彦) 구마모토대 교수의 저서 ‘마약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당시 각성제를 제조한 제약 회사는 23곳에 달했다고 한다.

1945년 패전 후에는 구 일본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필로폰 재고가 암시장을 통해 흘러나왔다. 일본 전역에 마약 중독자가 속출했다. 일본은 1951년까지 각성제 유통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1965년에는 ‘제2차 각성제 남용기’가 도래했다. 전쟁 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재건에 열을 올리는 노동자, 밤낮없이 활동하는 연예인과 그 뒤에 암약하는 야쿠자들의 손을 타고 각성제는 일본의 대표적인 마약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각성제 시장

일본의 마약사범 검거 실적은 지난 10여 년간 견조세를 유지하고 있다. 연간 1만4000명 안팎이 적발된다. 특이한 점은 헤로인, 코카인 등 소위 ‘1급 마약’의 비중이 줄어들고, 젊은층을 중심으로 각성제와 대마초 사용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각성제는 2016년 역대 최대치인 약 1.5t이 적발된 데 이어 2017년에도 1.1t을 기록, 기존 300~400㎏에 머무르던 압수량이 단번에 3배 이상 치솟았다. 세토 하루미(瀬戸晴海) 전 후생노동성 마약취체부장은 “젊은이들이 각성제를 ‘스피드’ ‘엑스터시’ 등 애칭으로 부르며 패션 감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서 “최근 인터넷과 휴대전화, 국제 항공우편을 이용하는 등 다양한 거래 행태를 보인다”고 했다.

여기에는 전 세계의 각성제 유통조직이 일본을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의 2018년 마약 시세 분석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서 각성제는 1g당 581달러에 거래된다. 세계 최고가다. 동남아시아의 5~10배, 한국의 2배 수준이다. 일본 폭력조직들은 묵시적 카르텔을 맺고 1965년부터 이 시세를 유지해 왔다. 해외 유통조직이 일본에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다. 특히 대만의 폭력조직이 일본의 조직과 결탁해 막대한 양을 수출하고 있으며, 북한산 밀수도 암암리에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사용자 수에 비하면 검거자 수는 50분의 1 수준으로 빙산의 일각이라는 분석도 있다. 처벌 수위가 낮고, 법적 구멍도 지적된다. 마약 소지 및 거래에는 중형을 선고하지만 사용 자체에 대한 조항은 불분명하다. 일반 허브나 입욕용 소금에 대마합성성분을 섞어 법망을 피하는 ‘탈법 드럭’은 아직도 뿌리를 뽑지 못했다. 마약사범 연예인의 복귀에도 관대한 편이다. 인기 가수 이노우에 요스이, 마키하라 노리유키, 나가부치 츠요시 등이 마약 사용으로 적발된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대표적인 예다.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사회는 바짝 긴장한 분위기다. 방일 외국인을 통한 마약 유입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에서다. 대만과 조선에 마약을 유통해 이득을 챙겼던 과거가 고스란히 역전된 형세로 나타나는 건 얄궂은 역사의 장난일까.

이진석 ‘오타쿠 진화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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