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프린스턴 대학의 기금은 약 200억달러(약 24조원)에 달했다. 졸업생의 기부금 등을 통해 만들어진 기금은 ‘프린스턴 대학 투자 회사(이하 프링코)’가 운용하는데, 1990년 이후 매년 15% 이상의 이익을 거뒀다. 기금은 학교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학의 1년 예산이 20억달러(2조4000억원) 정도인데, 기금의 5%는 매년 학교 운영자금으로 활용됐다. 학교 예산의 절반인 10억달러를 기금이 책임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등록금을 받지 않아도 학교 운영에 전혀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지면서 프린스턴 대학 기금은 약 40%의 평가손실을 입게 된다. 기금이 예산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으니, 학교 차원의 가용 예산이 5분의 1 이상 줄었다. 학교는 긴축재정을 해야 했다. 교직원의 연봉이 동결되고 학생 복지 역시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충격적인 소문이 퍼지며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프링코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그 당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알려진 ‘소말리아 해적’에게 기금을 투자하고 있다는 얘기가 돈 것이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학내 모든 채널을 통해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나중에 소말리아 해적 투자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프링코는 학내의 뜨거운 논의를 반영해 책임투자를 더 강화하기로 했다.

비슷한 논란이 2019년 대한민국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의 전범 기업 투자 비중은 줄고 있지만 절대 금액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연 일제가 우리 민족을 수탈했을 때 앞잡이 역할을 했던 기업에 국민연금이 투자하는 것이 옳은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술이나 담배 제조 업체와 같은 ‘죄악주’는 어떤가. 국민연금이 여기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은가. 쉽지 않은 문제다.

이것이 바로 ‘책임투자’에 대한 이야기다. 책임투자란 자본시장에서 투자를 결정할 때 기업의 환경(environment), 사회(society), 지배구조(governance) 등 ESG를 고려해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적이고 투명한 기업, 환경 친화적인 기업에는 투자하지만 비도덕적이고 환경 파괴를 일삼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음으로써 자본시장이 기업의 변화와 노력을 끌어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사회책임투자(Social Responsibility Investment)의 영어 머리글자를 딴 SRI펀드가 선진 자본시장에는 보편화돼 있다.

국민연금은 올해 7월 기금이 700조원을 넘어서며 전 세계적으로도 대규모 연금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박근혜 정부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통한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에 이용되며 불신을 키웠고, 가습기 살균제로 국민 피해를 야기한 옥시와 일본 전범 기업에 각각 4조원 규모로 투자해 비판받고 있다.


국민연금은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하고 세부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등 후속 조치를 내놓겠다고 했지만 ‘연금 사회주의’ 논란과 함께 아직 최종 확정이 안 됐다. 책임투자를 확대하는 정책 최종안도 수립하겠다고 했으나 이 역시 현재까지 정해진 바 없다.

언뜻 보면 국민연금의 책임투자는 당연해 보이지만, 우려되는 점도 적지 않다. ESG 요소에 집중해 투자 대상 기업을 골라내다 보면 수익률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책임투자가 기업의 도덕성을 얼마나 제고했는지 그 성과가 규명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책임투자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얼마 전 책임투자 관련 학술대회에서 네덜란드의 책임투자 전문가를 만났다. 이 사람은 전범 기업 투자는 책임투자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그 사람 입장에서 혹은 학술적으로 그 의견이 옳을 수는 있지만 국내 정서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나라마다, 또는 문화에 따라 책임투자의 기준이 다르다. 책임투자의 핵심은 ‘가치 판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국민연금이 세상의 모든 악을 단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디까지 국민연금이 개입할 수 있을까. ESG를 기업에 대한 영향력 확대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풀어야 할 많은 과제가 있고 우려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국민연금의 책임투자는 피할 수 없는 어젠다다. 좋든 싫든 국민연금은 공적연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건복지부의 책임투자 활성화 기조는 환영할 만한 일임은 분명하다.

국민연금은 정부나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책임투자의 기준을 명확하게 만들어 최소한 해당 이슈에 대해서만큼은 정부, 정치권의 개입 여지를 원천 봉쇄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실무적으로도 중요한 사안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운용역이 우리 노후 보장의 선봉장인데, 전범 기업 투자와 같은 이슈가 뜨면 국회에 불려가 소명해야 한다. 가치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아무런 기준도 정해주지 않고 나중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 이사장, 기금운용본부장, 혹은 실무자인 운용역이 지탄받을 수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기금운용본부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기금운용 성과를 낮추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명확한 책임투자 기준은 이를 선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