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서머스 교수는 2013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의 후임으로 지목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 의원의 반대에 더해 그가 과거 여성 차별적 발언을 한 것이 드러나며 낙마했고, 그 자리는 재닛 옐런이 대신하게 됐다. 이후 서머스 교수는 통화 정책의 효과를 부정하는 ‘구조적 장기 침체’ 이론을 들고나왔다. 그는 연준의 전통적 정책 도구인 정책 금리 조절이 저금리와 저성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계 경제 환경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서머스 교수는 이번 칼럼을 내놓기에 앞서 자신의 트위터에 중앙은행가들에게 통화 정책 대신 다른 방법을 쓰는 ‘혁명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런스 서머스(Lawrence H. Summers) 버락 오바마 행정부 국가 경제위원회 위원장, 하버드대 총장(왼쪽)안나 스탠스베리(Anna Stansbury)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오른쪽)
로런스 서머스(Lawrence H. Summers) 버락 오바마 행정부 국가 경제위원회 위원장, 하버드대 총장(왼쪽)
안나 스탠스베리(Anna Stansbury)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오른쪽)

세계 중앙은행 총재들과 경제학자들이 올해도 와이오밍주 ① 잭슨홀에서 만났다. 올해 잭슨홀 미팅 주제는 ‘통화 정책이 맞닥뜨린 문제들’이었는데, 이는 적절치 않았다고 생각한다. 배타적이면서도 안일한, 그래서 위험한 태도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② 물가 목표치나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수정, 양적 완화(QE) 확대 또는 축소와 같은 식의 대응은 지금 각국이 맞닥뜨린 위기의 돌파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지난 10년간 선진국의 물가 상승률이 목표(2%)를 밑돌았다는 사실과 일본은행이 끊임없이 추구한 광범위한 물가 상승 노력도 결국 실패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거짓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중앙은행이 통화 정책을 통해 물가를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은 현재 ‘통화 블랙홀’에 빠져 있다. 통화 블랙홀이란 통화 완화 정책의 확장 범위가 매우 좁은 유동성 함정을 뜻한다. 미국은 한 차례 더 리세션(경기 침체)을 겪으면 유럽과 일본이 처한 것과 같은 통화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 실제로 현 수준의 기준금리를 고려하면 경기 침체가 닥치더라도 추가로 금리를 인하할 여력이 없다. 또 현재 1.5% 수준인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마이너스 영역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양적 완화나 포워드가이던스 같은 정책을 쓸 수 있는 범위 역시 매우 제한적이다.

이 모든 상황은 ③ 구조적 장기 침체 개념에 힘을 실어준다. 이 개념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오하다. 2013년 내(서머스)가 이 개념을 부활시켰을 때 미국의 재정 적자와 부채 규모는 이미 엄청난 상태였고, 금리도 매우 낮았으며, 경제 성장률도 둔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총수요를 위축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고, 재정 정책을 통해 이 문제를 일부 해결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정책 논의는 신(新)케인스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은 거시적인 경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를 시장 균형으로 수렴되는 속도가 너무 낮아 마찰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이론대로라면 실질 금리를 낮추려는 모든 노력은 긍정적이며, 금리 탄력성(금리 변동에 따른 영향)이 커야 장기 침체를 극복할 수 있다. 과도하게 높은 실질 금리가 당장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 상황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먼저 고려할 수 있는 해결책이 통화 정책인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히 풀릴 수 없다고 본다.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매우 낮은 실질 금리와 낮은 물가 상승률이 동시에 나타나는 상황을 금리 수준이 더 내려가도 된다는 근거로 해석하고 금리 인하와 같은 전통적인 통화 정책을 쓰는 경향을 보였다. 나는 저금리의 경기 부양 능력이 약화됐거나 심지어 (경기 부양에) 역행했다고 생각한다. 보통 금리 하락은 내구재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실제로는 국내총생산(GDP)에서 내구재 비중이 감소하고 있다. 또 지금 상황에서 금리를 더 내리는 것은 금융회사의 자본 건전성을 갉아먹고 대출 능력을 약화시킨다.


8월 22~24일 미국의 휴양지 잭슨홀에서 연례 금융 심포지움이 열렸다. 23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왼쪽)과 마크 카니 영란은행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 블룸버그
8월 22~24일 미국의 휴양지 잭슨홀에서 연례 금융 심포지움이 열렸다. 23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왼쪽)과 마크 카니 영란은행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 블룸버그

금리 인하가 총수요에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모두 미치는 상황에서 금리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수요를 증가시키기보다는 제한할 수 있다. 이 경우 통화 정책은 완전 고용을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가도 끌어올릴 수 없다. 금리 인하가 수요를 증가시킨다 하더라도 그 효과가 약하다면 우려해야 한다. 단기적 수요 증가에 따른 효과는 저금리에 따른 역효과와 맞먹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거시적, 미시적 근거를 들 수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저금리는 자산 가격 거품을 촉진한다. 차입 비용을 줄여 투자자가 쉽게 대출받아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문제가 됐던 대부분의 부채 증가는 2000년대 초 만연했던 초저금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더 범위를 넓혀서 보면 경제 사학자 ④ 찰스 킨들버거 이후 금융 시장 거품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쉬운 대출과 풍부한 자금의 역할을 강조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저금리는 금융 회사의 수익성을 떨어뜨리고, 자본의 효율적인 배분을 막는다. 취약한 기업들도 쉽게 부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기존 기업들에 특혜를 줘 경쟁을 억제하는 데다, 애매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기업들도 쉽게 돈을 빌려 투자할 수 있다. 이런 경제는 어딘가 건강하지 못하다. 이런 모든 상황을 고려하면 금리를 내리는 것은 구조적 장기 침체에 대한 대응으로 충분치 못할 뿐만 아니라 역효과를 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구조적 장기 침체는 경제학자 토머스 펠리의 최근 주장과도 연결돼 있다. 그는 ‘마이너스 금리가 실업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구조적 장기 침체 이론을 확립해나가면서 한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경제 상황에 변동을 일으키는 마찰이나 경직성보다 근본적인 총수요 부족이 더 강조돼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적 장기 침체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통화 완화 정책은 필요하지 않다. 이때 필요한 것은 재정 정책 등 다른 수단을 활용해 수요를 촉진하려는 정부의 노력이다. 이번 잭슨홀 미팅에서 이 같은 논의가 나오길 희망하지만, 기대하지 않는다.


Tip

각국 중앙은행 총재가 모이는 연례 금융 심포지엄이다. 매년 8월 말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학자들이 모여서 세계 경제에 대해 논의하는데, 이 자리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기조연설로 시작한다. 그의 발언을 통해 그해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어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회의다.

연준의 목표는 고용과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금융 정책을 시도할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물가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 각종 정책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는 2011년 도입한 점도표나 2000년대 초반 도입한 포워드 가이던스 등이 있다. 점도표는 연준 위원들이 각자 경제 전망을 토대로 향후 예상 적정 금리 전망치를 점으로 찍은 것을 도표로 나타낸 것이고, 포워드 가이던스는 통화 정책 성명서나 연준 의장의 기자회견 등을 통해 중앙은행이 의도하는 정책 금리 방향을 직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QE는 시장에 풀린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연준이 가진 국채나 주택담보부채권 등을 시중에 팔면서 기준금리를 조절하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소비·투자 부진 등 만성적 수요 부족과 생산성 하락 등에 따라 구조적·장기적으로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으로 10~15년간 저성장이 지속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앨빈 한센 하버드대 교수가 1938년 처음 사용하고 2013년 서머스 전 재무부 장관이 부활시켰다. 당시 위기 국면이 장기화하자 세계 경제학자들은 구조 개혁을 먼저할 것인지, 추가로 경기를 부양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는 기존 건전한 정부 재정, 구조 개혁을 통한 공급 능력 확대 같은 전통적인 해결책 등은 효과가 없다고 봤다. 우선 재정을 풀어 경제를 궤도에 올려놓은 후에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인 통화 정책도 소용없다고 봤는데, 이는 주요국 기준금리가 제로 수준까지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재정 확대로 부채가 늘어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초저금리가 지속돼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금융 버블기를 분석한 경제사학자다. 그는 1978년 낸 저서 ‘광기, 패닉, 붕괴’에서 투기적 광기에서 비롯되는 거품과 이에 뒤따르는 금융 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17세기 화폐변조시대와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튤립 광기, 2001년 아르헨티나 페소화 위기까지 400년간 세계적으로 발생한 수십 차례의 거품을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