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유로존 최대 경제국인 독일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유럽에서 경기 침체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독일의 올해 2분기 경제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1%를 기록하며 지난해 3분기 이후 또다시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올해 3분기 전망도 우울하다.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독일 경제가 3분기에도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 갈 수 있다고 밝혔다. 미·중 무역전쟁과 글로벌 경기 둔화로 인한 수출 감소, 투자 심리 악화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독일의 경기 침체가 유로존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을 마련 중이다. 전문가들은 ECB가 현재 -0.4%인 시중 은행의 중앙은행 예치금리를 추가 인하하고 양적완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매달 약 500억유로 규모의 채권 매입을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필자는 ECB의 양적완화 정책만으로는 유로존 경기를 부양하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필자는 통화 정책과 금융·재정 정책이 동시에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크체이나 라이힐린(Lucrezia Reichlin) 런던 경영대학원 교수, 시장조사 업체 나우캐스팅 이코노믹스 공동창업자 겸 회장
루크체이나 라이힐린(Lucrezia Reichlin)
런던 경영대학원 교수, 시장조사 업체 나우캐스팅 이코노믹스 공동창업자 겸 회장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국) 경제 성장률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라는 게 확인되면서 유럽중앙은행(ECB)은 9월 통화 정책을 더 완화할 것으로 보인다. 11월 퇴임을 앞둔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이미 시중 은행의 중앙은행 예치금리(유로존 은행들이 ECB에 돈을 맡길 때 적용하는 금리) 인하를 예고한 상태다. 이에 더해 ECB는 채권 매입 등 ① 양적완화 정책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경기 부양책은 필요하다. 연간 인플레이션은 ECB의 목표치인 2%를 밑돌고 있으며, 금융 시장에선 이 상태가 한동안 유지될 것으로 예상한다. 더욱이 유로존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보다 더디게 성장했다. 유로존 경기는 2017년 3분기 정점을 찍은 이후 꺾였고, 올해 2분기에 더 둔화했다.

유로존에 속한 각국 정부는 ECB와 많은 경제학자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국가 재정 투입을 꺼리고 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ECB는 유로존 경제를 부양할 수 있는 마지막 열쇠를 갖고 있다.

문제는 통화 정책만으로 실질 성장률과 유로존의 물가 전망을 개선할 수 있는지다. 물론 통화 정책은 강력한 도구다.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펼친 정책의 핵심은 적자 재정을 통한 정부 지출 증가가 아니라 대규모 통화 공급이었다. ② 미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함으로써 통화 정책을 동원할 수 있었다. 지금 ECB도 획기적인 다른 수단을 써서 루스벨트 정부와 유사한 어떤 것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원칙적으로 ECB가 이미 마이너스인 예치금리를 지금보다 더 낮출 경우, 앞으로 단기 금리는 더 하락할 것이고 채권 수익률은 둔화할 것이다. 그리고 예치금리 하락은 유로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잠재적으로 유로존의 수출 가격 경쟁력을 더 높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논란을 빚을 수 있다. 특히 ECB의 예치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마이너스 금리를 고객에게 적용할 수 없는 은행들은 수익성이 악화할 것이다. ECB의 분석에 따르면 경쟁력 있는 유로존 은행은 기업 대출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할 수 있지만, 경쟁력 없는 은행은 그러지 못한다. 따라서 이 정책은 실현 가능한 수단이지만, 은행별로 다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책 시행 전에 복잡한 셈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ECB는 경쟁력이 약한 유로존 은행에 ③ 장기대출프로그램 3(TLTRO III)을 적용해 문제를 완화할 수 있을지 살피고 있다. 또한 은행의 ECB 예치금이 특정 금액 이하인 경우에는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지 않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조치는 독일·프랑스·네덜란드 등 ECB 총예치금 중 3분의 1을 보유하고 있는 유로존 주요국 은행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그는 유로존 경기 부양을 위해 양적완화 조치를 취하겠다고 시사한 상태다. 사진 블룸버그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그는 유로존 경기 부양을 위해 양적완화 조치를 취하겠다고 시사한 상태다. 사진 블룸버그

그러나 ECB가 마이너스 금리 추가 인하로 유로존 각국 은행에 비슷한 정책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를 더 낮추더라도 지금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처럼 하나의 목표에 하나의 수단으로 대응하는 단순한 구조에서 벗어나 많은 수단을 이용해 복잡한 설계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 같은 기술적인 고려는 차치하고라도 정책 결정자들은 경쟁력 있는 유로존 은행들이 마이너스 금리에도 불구하고 ECB에 예치금을 맡기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 유로존 주요국 은행들은 자국 국채 금리가 ECB 예치금 금리보다 낮으면 자국 국채를 보유하지 않으려 한다. 일반적으로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국채도 안전자산이지만 ECB 예치가 더 안전하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마이너스 금리의 경기 부양 효과는 감소한다. 마이너스 금리를 오래 유지하면 자산 가격에 거품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마이너스 금리나 양적완화만으로는 유로존 경제에 만연한 위험 회피(안전자산 선호)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ECB는 마이너스 금리 정책으로 안전자산을 보유할 때 드는 비용을 높여,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를 억제하려 한다. 하지만 기술·인구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이 커지고, 무역전쟁과 같은 정치적 위험이 발생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로존 각국의 경제와 금융 시장 상황은 큰 차이가 있다. 북유럽 국가와 특히 보수적인 재정 정책을 쓰는 독일 정도만 경제 상황이 좋아 국채가 안전자산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유로존의 정책 결정자들은 유럽에 새로운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을 목표로 포괄적인 금융·재정 정책 패키지를 설계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접근해야만 유로존 전체의 성장을 저해하는 뿌리 깊은 위험 회피에 대처할 수 있다.

1930년대 미국 경기 부양책의 핵심은 재정 정책보다 통화 정책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국 전체를 통합할 강력한 메시지와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종합적인 개혁 조치가 시행됐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유럽은 1930년대 미국이 선보였던 뉴딜정책의 ‘21세기 버전’이 필요하다.


Tip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부양 효과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중앙은행이 정부 국채나 여타 다양한 금융 자산을 매입해 시중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경기를 부양하는 통화 정책. 양적완화는 보통 초저금리 상태에서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 없을 때 경기 부양을 위해 사용된다. ECB는 2018년 말에 국채, 회사채 등을 사, 시장에 돈을 푸는 방식의 자산 매입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2015년 3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총 2조6000억유로가 시장에 풀렸다.

미국은 1929년 대공황 발생 이후에도 달러화 가치를 금에 고정시켜 놓는 금본위제를 유지했다. 금본위제는 금 보유량이 통화 공급량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경기 부양을 위해 통화량을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결국 루스벨트 정부는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통화완화 정책을 폈다. 뉴딜정책이라고 하면 테네시강 유역 개발로 상징되는 국토 개발 사업을 통한 재정 정책을 주로 떠올리지만, 루스벨트 정부는 통화 정책도 함께 펼쳤다.

ECB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 시중 은행에 저금리로 자금을 빌려줘 민간 영역으로 돈이 흘러가도록 하는 지원책으로, 장기대출프로그램 3으로 불린다. ECB는 2014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장기대출프로그램을 선보였고, 올해 9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세 번째 프로그램을 운용하기로 했다. 만기는 2년으로 기존보다 짧아졌다. 1차 장기대출프로그램은 대출받는 시점에 따라 만기가 4년 이상이었고, 2차 때는 4년 만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