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30년 전인 서력(西曆) 1989년 1월 7일의 일이다.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내각관방장관(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은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향해 비장한 표정으로 ‘헤이세이(平成)’라고 쓰인 종이를 내밀었다. 일본의 새로운 연호(年號)가 공개된 날이었다.

예수 탄생을 기원으로 한 서력을 쓰는 세계 대다수의 현대 국가에서 볼 때, 왕의 즉위에 따라 연도의 셈법을 바꾸는 일본의 연호는 낯설기만 하다. 일본에 사는 외국인에게는 불편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관공서나 은행에서 생년월일을 적을 땐 주로 서력 대신 일본 연호를 써야 한다. 서력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일본 연호로 변환해주는 웹사이트가 있을 정도다.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이 불편함이 일본인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도리어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세대별 일본인의 의식 깊은 곳에 다다를 수 없다.

30년 전 등장한 ‘헤이세이’ 글자가 일본 사회에 의미하는 바는 절대 작지 않았다. 쇼와(昭和‧1926~89) 시대의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죽음, 그리고 황태자 아키히토(明仁)의 즉위를 통한 헤이세이 시대 개막은 단순히 왕위의 이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상징의 소멸과 전범(戰犯) 국가에서 경제 대국으로 거듭나 버블 경제로 진입하는 기로에 서 있던 일본의 시대적 분기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많은 일본 중장년층이 입버릇처럼 “쇼와 시대가 좋았다”고 읊조린다. 그들에게 쇼와란 한때나마 동아시아 대다수 국가를 점령했던 대(大)일본제국의 위세와 패전 후 한국전쟁 발발의 반사이익과 대기업의 도약 그리고 경기 호황으로 한동안 다시 보기 힘들 풍요를 일궈낸 자부심이 서려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반면 헤이세이(1989~) 이후 태어난 일본의 청년에게 쇼와는 복잡한 감정의 대상이다. 그들이 누리지 못한 유복함에 대한 동경과 질시 사이의 그 어딘가, 또는 최근 유행인 레트로(복고) 스타일이 거리를 메우던 낭만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순히 낡고 늙은 구세대의 교집합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일본 젊은이에게 ‘쇼와 태생’이라고 소개하면 ‘와, 아저씨네요!’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걸 보면 말이다.


아키히토 일왕(왼쪽 세 번째) 등 일본 왕족들이 1월 2일 도쿄 일 왕궁에서 신년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아키히토 일왕(왼쪽 세 번째) 등 일본 왕족들이 1월 2일 도쿄 일 왕궁에서 신년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헤이세이 일본은 숱한 부침을 겪었다. 버블 경제의 붕괴와 ‘잃어버린 10년’, 한신대지진과 동일본대지진, 신흥종교단체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맹독성 신경가스) 테러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 동시에 전범국의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한 정치인들의 고뇌와 노력이 표출된 시기이기도 했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고이즈미 담화’와 ‘간 담화’를 통해 일본 내각이 돌아가며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주변국에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여기에는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일왕 아키히토의 평화주의적인 행보가 한몫했다. 그는 1945년 당시 11세의 나이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쿄를 보며 평화를 다짐했다고 한다. 일본 왕실 역사상 최초로 평민과 결혼하고, 재해지역 피난민을 찾아서는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춰 위로를 건넸다. 그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피해 입은 주변국을 순회하며 사죄를 거듭했다. 2001년 기자회견에서는 “간무(桓武) 일왕(제50대 일왕·재위 781~806)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밝혀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야스쿠니 신사(제2차 세계대전 전범들을 추모하는 신사)는 단 한 차례도 찾지 않았다.

아키히토 일왕의 평화적 언행은 일왕을 구심점으로 결집하려는 일본 우익세력에 사사건건 걸림돌이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 가능한 보통 국가’로의 회귀를 천명하는 아베 정권과는 총리 취임 이래 줄곧 대립각을 세웠다. 신임 총리가 취임하면 황궁으로 초청해 만찬을 여는 일본 왕실의 전통을 깨고 사적 교류를 거절해 왔다.

아키히토 일왕은 패전 후 헌법상 정치적 권능을 상실한 일왕으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일본의 우경화를 막아왔다. 결국 꺼내든 최후의 수단이 생전 퇴위라는 강수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일왕을 국가 원수(元首)로 재정의하고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삼는 개헌안을 내건 아베 정권에 왕위를 내던지면서 찬물을 끼얹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퇴위 소식은 일본 정부보다 NHK가 먼저 알았다. 아베 정권은 궁내청(일본 왕실 업무를 주관하는 행정기관)으로부터 ‘패싱’당한 셈이다.

일본 정부는 4월 1일이 되면 새 연호를 발표할 계획이다. 이는 적잖은 사회적 비용을 수반한다. 연호가 채 확정되지 않아 달력 제조업자는 물론 수많은 관공서와 금융기관이 혼란스러워한다. 양위에 따른 국가공휴일 여부도 채 정해지지 않았다. 정부가 실제 퇴임일(4월 30일)보다 조금이라도 앞당겨 새 연호를 내놓으려는 이유다.


1989년 1월 7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당시 일본 내각관방장관이 ‘헤이세이(平成)’라고 쓰인 일본의 새로운 연호(年號)를 공개하고 있다. 일본은 아키히토(明仁) 일왕 퇴임으로 오는 4월 1일 새로운 연호를 발표할 계획이다. 사진 분슌(文春)온라인
1989년 1월 7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당시 일본 내각관방장관이 ‘헤이세이(平成)’라고 쓰인 일본의 새로운 연호(年號)를 공개하고 있다. 일본은 아키히토(明仁) 일왕 퇴임으로 오는 4월 1일 새로운 연호를 발표할 계획이다. 사진 분슌(文春)온라인

헤이세이가 남긴 평화의 의지

반면 ‘헤이세이 최후의 세일’을 내건 유통 업계와 헤이세이가 끝나기 전에 결혼하려는 수요가 몰리며 웨딩 업계는 갑작스러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쇼와 시대에 태어난 일본인은 헤이세이 기간 중 결혼하지 못한 처지를 가리켜 ‘헤이세이 점프(헤이세이 출생으로 구성된 일본 남성 아이돌그룹명)’라고 자조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사회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아키히토 일왕은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까지 평화를 호소하고 있다. 퇴위 전 마지막 생일인 지난해 12월 23일에는 기자회견을 열고 “헤이세이가 전쟁 없는 시대로 끝남에 안도한다”면서 “과거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진 역사를 후세에 제대로 전해야 한다”고 울먹였다. 올 1월 2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열린 연례 왕궁 행사에는 15만4800여 명의 일본인이 찾아 즉위 후 최다(最多)를 기록했다. 그는 “일본과 세계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헤이세이가 남긴 평화를 향한 의지는 그렇게 다음 세대의 손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일본 우경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진정한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희망의 싹일 것이다. 그러니 불편한 연호쯤은 감안할 요량이다. 사요나라(안녕히 가십시오), 헤이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