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늦은 밤 도쿄 시부야역 주변을 걷다 보면 신경 쓰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기 몸집만 한 캐리어를 세워둔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소녀들. 진한 화장과 어른스러운 옷차림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앳된 얼굴의 아이들은 왜 항상 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가출소녀다. 주로 지방을 뛰쳐나와 야간 버스에 몸을 싣고 무작정 동경하던 장소인 시부야로 모여든다. 불화, 학대, 사채 등 집을 나온 이유는 다양하다. 갈 곳도, 아는 사람도 없는 소녀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린다. ‘신(神)과 같은 이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뜻의 ‘가미마치(神待ち)’가 이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말이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면서 주변을 경계하듯 훑어보고, 코인로커룸에 분주히 짐 정리를 하며 누군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린다.

가출소녀들에게는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처음에는 소지하고 있는 약간의 돈으로 24시간 운영하는 패밀리레스토랑이나 간이 취침시설이 있는 넷카페(일본식 PC방), 노래방 등을 찾는다. 가진 돈이 떨어지면 당장 밤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게 된다. 이런 처지를 노리고 접근하는 이들은 대개 성적 대가를 요구한다. 미성년자의 성매매나 원조교제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의지할 곳이 없는 처지를 노리고 가출소녀들을 악용하려는 이들이 번화가에는 너무도 많다.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된 ‘JK 비즈니스’가 성행하게 된 계기다. JK란 ‘여고생’의 일본어인 ‘조시코세이(女子高生)’의 알파벳에서 따온 은어다.

시부야 인근의 ‘만남 카페’는 갈 곳 없는 여성들이 무료로 쓸 수 있는 휴식공간과 식음료를 제공한다. 여성들이 대기하는 공간은 매직미러(안에서는 일반 거울처럼 보이지만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를 통해 남성들이 있는 바깥으로 노출된다. 남성들은 이곳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서 마음에 드는 여성을 지목해 함께 외출을 청하는 구조다. 한인 타운이 있는 신오쿠보(新大久保)와 신주쿠를 잇는 햐쿠닌쵸(百人町)는 ‘러브호텔’이 밀집한 지역이다. 이곳 길가도 잠시 몸을 맡길 상대를 기다리는 가출소녀들이 주로 배회하는 지역이다.

최근에는 트위터를 통해 몸을 맡길 상대를 찾는 가출소녀들이 늘었다. ‘가미마치’ ‘재워줘’ 같은 단어에 해시태그(#)를 붙여 검색하면 ‘집을 나와서 갈 곳이 없어요’ ‘밥 좀 사 주세요’ ‘노래방에 같이 가고 싶어요’ ‘하루만 재워 주세요’ 같은 내용의 글이 하루에도 수백 건씩 나온다.

적극적으로 가출소녀를 찾는 글을 올리는 남성들도 눈에 띈다. 지난해 12월에는 아오모리현에서 가출한 15세 여중생을 트위터로 접촉해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성인 남성이 미성년자 유괴 혐의로 체포되는 일도 벌어졌다.

일본에서 ‘원조교제’라는 말이 유행어로 떠오른 것이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삐삐’라는 무선호출기와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가출소녀들이 가족에게 들키지 않는 연락수단을 손에 넣으면서 불거진 사회현상이다. 20여 년이 지났지만, 수단이 바뀌었을 뿐 상황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본 경시청(도쿄를 관할하는 경찰본부)에 따르면 2017년 가출 등으로 인한 행방불명자 수는 8만4850명으로 지난 10년간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중 10대와 20대가 39%(3만3464명)에 달한다. 그런데 ‘미성년자의 가출 보호 건수(경찰이 보호시설 등에 인계한 수)’는 연간 500건 안팎에 불과하다. 가출소녀에 대한 대책은 사실상 방치 상태인 셈이다.

결국은 시민단체들이 나섰다.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이 가출소녀들이 모이는 지역에 출몰하는 ‘쓰보미 카페’라는 이름의 핑크 버스다. 쓰보미는 ‘꽃봉오리’라는 뜻이다. 대형 관광버스를 개조한 핑크 버스는 주 1회 시부야와 신주쿠를 오가며 가출소녀들에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과 음식, 와이파이를 무료로 제공한다. 세면도구와 생리대, 콘돔도 나눠준다. 여자 중고교생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일본 사단법인 컬래버가 운영하는 가출소녀 지원 버스 ‘쓰보미 카페’. 사진 이진석
일본 사단법인 컬래버가 운영하는 가출소녀 지원 버스 ‘쓰보미 카페’. 사진 이진석

가출소녀 지원 버스, 한국서 아이디어 따와

이 버스를 운영하는 사단법인 ‘컬래버(Colabo)’의 니토 유메노(仁藤夢乃·27) 대표는 10년 전만 해도 시부야의 길거리에서 한 달에 25일가량을 보내던 ‘여고생 난민’이었다. 가족과 틀어진 사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는 학교를 벗어나 거리를 방황했다.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다”고 느꼈다. 지금의 가출소녀들처럼, 니토 대표 역시 넷카페와 가라오케, 패스트푸드점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목격한 것은 소녀들을 착취하려는 매춘업자들이었다. 미성년자 성매매와 원치 않은 임신 그리고 낙태로 이어지는 현실을 낱낱이 지켜봤다. 같은 처지였던 자신이 어른이 되면 어떻게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다고 생각한 결과, 2011년 가출소녀 지원 단체를 설립했다.

니토 대표가 핑크 버스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서울 방문이었다. 비슷한 청소년 가출 문제를 겪고 있는 한국에서 해결책의 일환으로 운영하는 쉼터 버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올 10월부터 거리를 달리기 시작한 핑크 버스는 일본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며 후원이 이어지고 있다. 지원금이 쌓이면 일본 전역으로 운행 버스를 늘려간다는 목표다.

2009년 설립된 비영리활동법인인 ‘본드(Bond) 프로젝트’는 상담사들이 번화가를 누비며 가출소녀들과 면담을 진행한다. 필요한 경우 변호사를 통해 의료기관이나 경찰, 지원 단체와 연결해 준다. 이곳 대표인 다치바나 준(橘ジュン)은 르포작가 출신이다. 가출소녀들의 실태를 알리는 취재 활동을 이어가다 지원 단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사회에서 가출은 ‘가정이나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국가 차원의 해결책이 미온적인 이유다. 지원 단체들은 가출소녀들이 누군가에게 상담을 청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집을 나서기 전에 가족이나 학교에서 자신의 잘못이라고 책망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말을 태어날 때부터 들어 온 소녀들은 ‘이렇게 된 것은 스스로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들에게는 먼저 다가가지 않는 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간절히 바란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신(神)이 더 이상 추악한 어른들이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