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10월 19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이탈리아의 국가 신용등급을 ‘Baa2’에서 ‘Baa3’로 한 단계 내렸다. Baa3는 ‘투자 등급’ 중 가장 낮은 단계이며, 투자 부적격 단계인 ‘투기 등급’ 중 가장 높은 ‘Ba1’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등급이다. 반체제 정당인 ‘오성운동’과 극우 성향의 ‘동맹당’이 결성한 이탈리아 포퓰리즘 연립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EU에 제출했는데, 여기엔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2.4%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이탈리아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에는 빈곤층에 월 780유로(약 100만원)의 기본 소득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해 연금수령 연령 하향 조정, 감세, 사회간접자본 시설 대규모 정비 등 포퓰리즘 정책이 망라돼 있다.
짐 오닐(Jim O’Neill)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소장 영국 서리대 박사, 전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회장, 맨체스터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짐 오닐(Jim O’Neill)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소장 영국 서리대 박사, 전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회장, 맨체스터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세계 각지의 정치(EU)적 혼란과 새로운 위기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슈에도 불구하고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은 지난 2년간 강력한 경제 성장을 이어왔다. 하지만 올해 출범한 이탈리아 포퓰리즘 연립정부 탓에 ‘유로존 최악의 날은 이제 과거 얘기’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

이탈리아는 내가 금융계에 입문했던 1982년 처음 조사하고 공부했던 나라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나라에 왠지 모를 각별한 애정을 느낀다. 그때 나는 미국의 한 대형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탈리아의 GDP 대비 부채 비율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콘퍼런스콜을 자주 열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거의 모든 회의 참석자들이 가지고 있던 의문은 ‘언제 이탈리아가 디폴트(채무 불능)에 빠질 것인가’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이탈리아의 상황은 엉망이 돼버렸고 지금도 비슷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특히 ① 지금 이탈리아 정부는 EU에 반기를 들고 대립하는 모양새다. 만약 이탈리아 디폴트 위기가 재점화된다고 하더라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30년도 더 된, 나의 과거 경험에 비춰봤을 때 이탈리아의 경제 문제는 유로화 도입 훨씬 이전부터 제기돼 왔다. 이탈리아의 생산성은 아주 오랫동안 유럽 평균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낮은 생산성 탓에 유로화 도입 이전 10년 동안 경제성장률도 좋지 않았다. 동시에 간헐적으로 분출된 급격한 성장에 대한 열망은 후에 여러 위기의 씨앗이 됐고, 이에 따라 이탈리아의 리라화 가치도 하락했다.

어떤 사람들은 리라화 가치가 약세를 보였던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② 리라화 약세가 경제 성장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화 약세에 따른 성장 촉진’이라는 공식은 지금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 체제하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유로화 도입 전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낭만주의자’들이 간과한 것이 또 있다. 유로화가 도입된 덕분에 이탈리아의 인플레이션이 안정됐고 금리도 낮아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과거 사례를 볼 때 리라화 가치 하락에 따른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았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통화 약세는 나라의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한 강력한 구조적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유로존의 재정·통화 정책 구조에 갇혀 이탈리아의 명목 경제성장률이 취약해지고 인플레이션이 지나치게 떨어진 데다, 나라 부채도 증가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③ 하지만 연정(聯政) 출범 이전 이탈리아의 재정 적자 수준은 유로존 다른 회원국이나 G7(캐나다,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 미국)보다 오히려 잘 조절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탈리아를 통치했던 주요 정당들은 충분한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국민은 좌파와 우파의 포퓰리즘 정책을 통합한 ‘비(非)전통적인’ 형태의 연정을 선택했다. ④ 예컨대 동맹당(Lega Nord)은 감세를 약속한 반면 ‘오성운동’은 기본 소득 보장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탈리아 경제에 필요한 것은 생산성 개선을 목표로 하는 광범위한 구조 개혁 프로그램이다. 이것만이 ⑤ 이탈리아의 인구통계학상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여성 인력 고용 활성화 정책뿐만 아니라 청년층을 위해 더 매력적이며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 EU도 힘을 보태야 한다. EU는 이탈리아 정부가 어려운 한 발짝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과거 유럽연합위원회(EC)와 유럽중앙은행(ECB), 독일 정부는 ‘안정성장협약(SGP·유로화 안정 차원에서 회원국 재정적자 상한선을 GDP의 3%로 정한 협약)’을 내세워 회원국 전체에 강제적으로 재정적자 상한선을 지키도록 하는 실수를 저지른 바 있다. 일부 경제가 어려운 국가에 예외가 적용되기도 했지만, ⑥ 이탈리아의 경우 부채 수준이 이미 높을 대로 높아져버린 탓에 더는 여력이 없다. 벨기에와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정부 부채를 줄이려면 지속적인 경제 성장 외에는 답이 없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장기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개혁이 단기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각국 정부는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문제는 통화 정책이다. ECB는 인플레이션 목표치 2%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 더 열린 마음을 갖고 임해야 한다. 이탈리아는 다양한 통화 팽창 정책에 따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에도 ECB와 독일이 설정한 2% 인플레이션 목표에 갇혀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EU 당국은 이탈리아 정부의 현재 계획에 지나치게 반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민주적 방식에 따라 선출된 포퓰리즘 정부에 대해 EU 당국이 걱정을 넘어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 단계에서 이탈리아에 필요한 것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것, 이 한 가지다.

일각에서는 이탈리아가 유로존 회원국이 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말한다. 유로존 회원 가입 기준을 더 까다롭게 만들어 최적의 단일 통화존을 만들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독일과 프랑스 업계에서는 이탈리아의 경쟁력 있는 기업들을 동맹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 요구에 따라 이미 회원국이 된 나라인데, 이제 와서 그 나라를 차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과거에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식의 논의는 무의미하다.

EU의 재정·통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가진 정책 당국자들은 이탈리아에서마저 그리스식 위기가 재현된다면 이번에는 유로존 전체가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 수개월간 정책 당국자들 손에 달려 있다.


Tip

EU는 10월 23일 이탈리아 정부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을 최종 거부하고 3주 안에 수정안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EU가 회원국 예산안을 거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예산안 중 재정적자 비율이 높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정부가 제시한 재정적자 비율 2.4%는 EU가 규정한 재정적자 한도를 넘지는 않지만, 이전 정부가 약속했던 0.8%의 세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EU는 이탈리아 재무장관에게 공문을 보내 “이탈리아의 예산안이 EU 규정을 극히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 목표치 이탈 수준도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비판했다.

리라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면 상대적으로 다른 통화보다 리라화가 싸진다. 관광 대국인 이탈리아에 관광객이 몰려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일본에서 아베노믹스에 따른 엔저(低) 효과로 관광 산업이 붐을 이룬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2017년 기준 이탈리아 GDP에서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3%에 달한다.

이탈리아 연정 출범 직전인 2017년 기준 이탈리아의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2.31%였다. OECD에 따르면 EU는 0.95%, 프랑스 2.59%, 미국 4.94%, 일본 3.42%(미·일은 2016년)였다.

전통적으로 보수파는 감세와 작은 정부를 주장해왔다. 기본 소득 보장은 진보 성향에 가깝다. 이탈리아에서는 감세 정책을 내놓은 극우 성향의 동맹당과 기본 소득 보장을 주장하는 반체제 성향의 오성운동이 연립정부를 맺음으로써 보수·진보 양쪽의 포퓰리즘적 성향이 극대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탈리아도 고령화에 신음하고 있다. 소수의 청년층이 다수의 노년층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다.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난 8월 기준으로 31%를 기록했을 만큼 청년 실업률이 여전히 높다. 이때문에 이탈리아를 탈출하는 청년들도 많다. 2016년 해외로 떠난 이탈리아인은 12만4076명으로 전년보다 15.4% 증가했다.

이탈리아의 GDP 대비 부채 규모는 131%로 유로존 회원국 중에서 그리스 다음으로 높다. 그리스는 178.6%, 3위 키프로스는 97.5%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