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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어짜서 쓰는 치약이 아닌 눌러 쓰는 ‘펌핑치약’을 한 회사가 독점할 수 있을까. LG생활건강은 2013년 ‘페리오 펌핑치약’을 출시해 5년간 시장을 점령했다. 짜서 쓰는 치약은 점성이 있어 끈적하지만, 눌러쓰는 치약은 그보다 묽어야 치약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올 수 있어 개발을 거쳐야 했다. 2018년 애경산업은 후발주자로 ‘2080 펌핑치약’을 시장에 내놨다. 그러자 LG생활건강은 즉각 “상표권을 침해했다”며 반발했다.

‘치약 업계 대전’은 먼저 특허심판원으로 넘어갔다. 특허청에서 ‘펌핑치약’에 대한 상표등록을 거절당한 LG생활건강이 특허심판원에 이의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특허심판원은 펌핑치약을 시장에 먼저 내놓고 광고와 홍보에 힘을 쏟은 LG생활건강의 상표권이 인정됐다고 봤다. 이에 법무법인 광장이 대리한 LG생활건강 측은 애경산업을 상대로 상표 사용금지 및 손해배상을 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심 서울중앙지법 민사 재판부에 이어 2심 격인 특허법원 재판부까지 법원은 모두 애경산업의 손을 들어줬다.


‘펌핑’은 ‘치약 짜는 방법’에 불과…“상표권 효력 없다” 입증한 지평

특허법원은 대부분의 사용자가 ‘펌핑’을 독자적인 브랜드로서 인식하기보다는, 제품 용기의 사용 방법을 지칭하는 용어로 인식하고 있다고 봤다. 또한 펌핑 용기가 치약뿐만 아니라 샴푸, 주방세제 용기 등으로도 널리 쓰이는 점도 펌핑이 LG생활건강만의 치약 브랜드로 인지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 나왔다.

특허법원 제22부(재판장 김상우)는 9월 10일 LG생활건강이 애경산업을 상대로 제기한 부정경쟁 행위 금지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펌핑이 국내에서 LG생활건강 상품에 대한 출처를 표시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됐다고 볼 수 없다”면서 “일반 수요자나 거래자들이 LG생활건강 제품과 애경산업 제품을 혼동해 구매했다고 볼만한 사정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사건의 발단은 LG생활건강과 애경산업이 비슷한 이름으로 펌핑치약을 출시하면서 시작됐다. LG생활건강은 2013년 7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눌러쓰는 치약인 페리오 펌핑치약 3종을 내놨다. 페리오 펌핑치약은 출시 6년 동안 누적 판매 2500만 개를 기록하면서 LG생활건강의 ‘효자 상품’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애경산업이 지난 2018년 7월 2080 펌핑치약을 출시하자 LG생활건강은 “국내 치약 제품 중 처음으로 사용한 ‘펌핑’이란 단어를 애경산업이 무단으로 사용했다”며 소송을 냈다.

LG생활건강 측은 ‘펌핑’이라는 단어가 심장이 콩콩 뛰는 감성적인 느낌을 담은 자신들만의 브랜드라고 주장했다. LG생활건강이 펌핑치약을 먼저 시장에 내놓고 제품 광고비로 103억원을 지출하면서, 일반 수요자가 ‘펌핑’을 보면 LG생활건강 제품이라고 식별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또 애경산업이 자신들의 ‘펌핑’이라는 단어가 아닌 ‘펌프’나 ‘디스펜서’ 등의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펌핑을 사용해 상표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애경산업을 대리한 법무법인 지평 성창익(사법연수원 24기)·최정규(36기)·허종(1회 변호사시험) 변호사는 “펌핑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눌러쓰는 방식의 제품 용기 사용 방법으로 통한다”면서 “후발주자들의 사용에 대해 엄격하게 대응해선 안 된다”고 반박했다. 성 변호사는 “변론 중 LG생활건강이 ‘펌핑’이라는 단어를 독점할 경우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우리나라 언어 습관엔 펌핑이라는 단어가 입에 익는데, 대체 단어를 제시하면서 더 이상 ‘펌핑’을 쓰지 못한다면 공익적으로도 문제가 된다고 봤다”고 말했다.

재판부도 “펌핑은 ‘펌프 사용’ ‘펌프 작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펌프를 눌러 용기에 있는 액체, 거품 또는 젤 형태의 제품을 인출시켜 사용하는 방법”이라며 “화장품이나 샴푸 등 욕실 제품, 주방 세제 등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어 눌러 쓰는 치약에 사용된다고 해서 다르게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지평이 재판부를 설득한 ‘결정적 한 방’은 설문조사였다. 사실 펌핑치약에 대해 설문조사를 먼저 진행한 건 LG생활건강 측이었다. LG생활건강 측은 ‘펌핑’이 어떤 뜻으로 와닿는지 만 20~59세 여성 1000명을 온라인으로 조사했다. 그 결과, 펌핑치약 브랜드를 LG생활건강 제품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61.4%로 집계됐고, ‘펌핑’ 부분을 제품의 브랜드 이름이라고 응답한 경우도 51.9%에 달한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LG생활건강의 ‘페리오 펌핑치약’과 애경산업의 ‘2080 펌핑치약’. 사진 LG생활건강·애경산업
왼쪽부터 LG생활건강의 ‘페리오 펌핑치약’과 애경산업의 ‘2080 펌핑치약’. 사진 LG생활건강·애경산업

특허심판원 심결 뒤집은 비결은 ‘설문조사’

재판부는 설문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문조사 결과의 객관적 타당성과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LG생활건강의 설문조사는 온라인 조사로 만 20~59세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것인데, 치약은 생필품으로서 일반 수요자가 여성으로 제한되지 않음에도 합리적 이유 없이 남성 수요자를 배제했다는 점에서 대표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또 LG생활건강의 설문조사 결과는 유도성 질문들이 포함돼 응답자에게 선입견을 주는 문항들로 구성돼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이들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귀하께서는 ‘펌핑’ 치약 브랜드를 어느 회사의 제품으로 알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넣었다. 재판부는 ‘펌핑’이 치약 브랜드라고 인지하도록 이끈 다음 ‘사진 속에서 제품의 브랜드 이름을 나타낸 부분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해 펌핑이라는 부분을 선택하도록 유도했다고 지적했다.

지평은 항소심에서 자체 설문조사로 ‘맞불 전략’을 썼다. 앞서 LG생활건강이 재판부로부터 지적받았던 부분들을 참고해 전국 대도시에 거주하는 만 20~59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보다 객관적인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설문조사 결과 일반 수요자 92%는 펌핑이 ‘위에서 아래로 (되풀이해) 누름’을 뜻한다고 답변했다. 또 애경산업의 ‘2080 펌핑치약’ 제품 이미지를 제시했을 때 89%가 해당 제품의 상표를 ‘2080’으로 인식하고 0.2%만이 ‘펌핑치약’을 상표로 인식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지평은 소비자들이 ‘펌핑’을 보고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펌핑 앞에 붙은 ‘페리오’나 ‘2080’을 보고 제품을 선택했다고 강조했다. 상표법 제33조 제1항 제3호에서 정한 상표가 지니고 있는 관념, 즉 수요자나 거래자의 그 상표에 대한 이해력과 인식의 정도 등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한 셈이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도 두 상표가 유사하지 않다고 봤다. 재판부는 “LG생활건강과 애경산업 치약은 ‘펌핑’ 부분이 공통되지만, 펌핑은 ‘용기 상단의 펌프 부분을 눌러 사용하는 펌핑형 치약’임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펌핑은 상품의 사용 방법을 표시한 것으로, 특허 판단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LG생활건강이 여전히 펌핑치약에 대한 상표권을 주장하면서 양측의 ‘법리 싸움’은 대법원까지 이어지게 됐다.

김민정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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