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에서 내놓은 5종의 SUV. 사진 FCA 코리아
지프에서 내놓은 5종의 SUV. 사진 FCA 코리아

국내 수입차 시장을 점령한 독일 브랜드들 사이에서 선전하고 있는 미국 브랜드가 있다. 1940년대에 만들어진 정통 SUV 브랜드 ‘지프(Jeep)’가 그 주인공이다. 최근 수년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유행을 탔던 SUV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매끈한 차량들이었다. 지프는 험한 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투박한 외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2019년, 한국 시장에서 ‘정통 SUV 마니아들의 브랜드’에 머물던 지프는 점차 소비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지프는 지난 4월 한 달 동안 전년 동기 대비 88.3% 증가한 915대(수입차협회 신규 등록 대수 기준)를 판매했다. 국내 수입차 브랜드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전체 수입 SUV 브랜드 가운데 판매량 2위, 점유율은 14.1%였다. 지프는 올해 1~4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74.3% 늘어난 3059대를 판매했다. 지프를 생산하는 이탈리아와 미국의 합작 자동차 회사 피아트크라이슬러의 한국 법인인 FCA 코리아의 파블로 로소 사장은 “1만 대 클럽 진입의 목표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밝혔다.

역사가 78년에 달하는 SUV 브랜드의 인기가 갑자기 치솟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지프가 유지해 온 ‘정통 사륜구동 SUV’라는 정체성이 빛을 봤다고 분석했다. 마니아층을 단단하게 다져온 브랜드가 신형 모델을 출시하면서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황욱익 자동차 칼럼니스트는 “지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프를 타면서 느끼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과거에 지프를 타던 사람들이 다음 번 차량을 살 때도 지프를 찾는, 즉 브랜드 재구매율이 굉장히 높은 브랜드”라고 설명했다.

지프 마니아들은 지프를 동급의 자동차들과 비교해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경제적인 연비나 편안한 승차감 등 통상적으로 자동차를 보는 기준이 힘을 잃는다. 강인한 개성을 가진 지프 고유의 브랜드 가치 덕이다.


란체스터 전략 제대로 활용한 지프

지프가 한국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란체스터 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란체스터 전략은 ‘란체스터 법칙’을 역이용한 것인데, 란체스터 법칙의 요지는 ‘전면전을 펼칠 경우 수적으로 우세인 쪽과 열세인 쪽의 전력(戰力) 차는 수적인 차이의 제곱으로 커진다’는 것이다. 가령 조건이 같은 아군 전투기 6대와 적군 전투기 4대가 공중전을 벌이면 적군 전투기를 모두 격추시킨 후 아군 전투기 2대가 남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제곱인 4대가 남는다.

앞서 소개한 란체스터 법칙에 따르면, 강자는 한 번에 많은 물량을 투입해 상대를 제압해야 아군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이 법칙에서 반대로 약자가 취할 수 있는 경영 전략을 도출한 것이 란체스터 전략이다. 약자의 생존법은 강자와 전력 차가 가장 작은 영역에서 전투를 벌여서 그곳에 힘을 집중해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이 있는 기업이 아니라면, 강자와의 차이가 작은 국지적인 부분을 선택하고 여기에 역량을 집중해 양적 열세를 이겨내라는 게 란체스터 전략의 핵심이다.

FCA 코리아가 한국 시장에서 지프 브랜드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란체스터 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프는 ‘SUV 전문 브랜드’를 표방하면서 지난해 초부터 국내에 지프 전용 전시장을 12개 열었다. FCA 코리아 관계자는 “올해 안으로 전국에 있는 FCA 전시장을 지프 전용 전시장으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피아트크라이슬러의 간판을 떼고 이를 전부 지프로 바꾸겠다는 의미다. FCA 코리아가 지프 전용 전시장을 연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FCA 코리아가 한국 시장에 정통 SUV 브랜드로 승부수를 띄우는 것은 현재 한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이 있는 현대·기아차가 허술한 틈새시장을 집중 공략하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전체 시장을 놓고 보면 현대·기아차의 시장 점유율이 높지만, 이 회사가 모든 면에서 강한 것은 아니다. 경차, 소형·중형·대형 세단, 고급 세단, SUV 등 대응해야 할 분야가 너무 많다.

FCA 코리아는 현대·기아차의 브랜드 영향력이 없다시피 한 ‘정통 SUV’라는 분야에 화력을 집중했다. 현대·기아차에서 생산한 차들을 보면 휠 하우스(자동차에서 자동차 바퀴 근처를 감싸는 부분)가 대부분 바퀴처럼 둥근 모양이다. 이 때문에 자동차와 바퀴 사이 공간이 좁고, 차체가 전반적으로 둥글고 매끈한 모양을 띠어 승용차 같은 느낌을 준다. 현대차의 인기 SUV였던 ‘싼타페’, 기아차의 ‘스포티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지프는 1940년대부터 ‘정통 SUV’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사다리꼴 형태의 휠 하우스 모양을 변경하지 않고 모든 모델에 유지했다. 레니게이드·컴패스·체로키·그랜드체로키·랭글러 등 5개 차종 전부 사다리꼴 형태의 휠 하우스를 적용했다. 이 때문에 어떤 차를 봐도 한눈에 ‘지프에서 나온 차다’라는 느낌을 준다.

사다리꼴 형태의 휠 하우스는 험로를 주행할 때 바퀴와 차체 사이에 자갈이 끼였을 때도 문제없이 털어내고 주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도로가 잘 갖춰진 최근에 와서는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지프의 고유한 특성을 보여주는 디자인으로 자리잡았다. 컴패스와 체로키 그리고 그랜드체로키 등 ‘도심형 SUV’로 내세운 차종에서도 같은 형태가 적용됐다. 동급의 현대·기아차는 물론 대부분의 독일 차 브랜드에서도 보기 어려운 개성 있는 디자인이다.

여기에 신형 모델에는 일반 소비자들을 유인할 수 있도록 불편을 일부 개선하기도 했다. 황욱익 칼럼니스트는 “기존 지프는 ‘잔고장이 많거나 불편하다’는 요인을 감수할 정도로 브랜드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에만 인기를 얻었지만, 신형 모델의 경우 불편을 개선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4월 출시된 랭글러의 신형 모델인 ‘올 뉴 랭글러’의 ‘랭글러 파워톱 4도어’는 지프 브랜드 최초로 전동식 소프트톱(천 소재로 만든 지붕)을 탑재했다. 기존 랭글러는 이 소프트톱을 힘을 줘서 수동으로 열고 닫아야 했다.

비슷한 사례로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경차로 유명한 스즈키자동차의 소형 SUV ‘짐니’가 없어서 못 파는 차종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20년 만에 나온 완전변경 모델인 4세대 짐니는 일본에서 계약하고 1년은 기다려야 차량을 받을 수 있다. 가격은 한화로 2000만원대. 작고 경제적이지만 험로를 주행할 수 있는 ‘오프로드 감성’을 담았다는 평가다. 짐니의 인기 비결 중 하나는 차량으로 주인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튜닝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일본의 자동차 튜닝 회사 왈드 인터내셔널은 메르세데스-벤츠의 고가 SUV ‘G-바겐’처럼 차체를 꾸밀 수 있는 튜닝 키트를 내놓기도 했다.


Plus Point

쌍용차에 구형 코란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과거 ‘사륜구동의 명가’로 불렸던 국내 쌍용자동차의 핵심 상품은 ‘코란도(지프형 차)’였다. 코란도는 1969년에 첫 출시된 차종으로, 2005년까지 특유의 각진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후 쌍용차는 코란도 C라는 유선형 디자인의 도심형 SUV를 내세웠다.

자동차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구형 코란도를 다시 출시해달라’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각진 차체 탓에 지프를 떠올리게 하는 국산 정통 SUV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구형 코란도를 쌍용차에서 다시 생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쌍용차가 지난 2006년 구형 코란도와 ‘무쏘’의 생산 라인을 러시아 자동차 회사 타가즈에 팔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코란도는 ‘타거’라는 이름으로, 무쏘는 ‘로드 파트너’로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