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 BTS(방탄소년단)를 내세운 루이비통의 2021 가을/겨울 남성 패션쇼. 사진 루이비통
올해 7월 BTS(방탄소년단)를 내세운 루이비통의 2021 가을/겨울 남성 패션쇼. 사진 루이비통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내 가치는 내 시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11월 28일(현지시각) 암 투병 끝에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루이비통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는 생전에 자신은 전통적인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 이민 1세대로 루이비통의 첫 흑인 수석디자이너가 된 그는 힙합과 스케이트보드에 뿌리를 둔 길거리 패션을 럭셔리의 범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천재적인 디자이너(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 ‘우리 시대의 앤디 워홀(가디언)’ 등으로 불렸던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전통과 규율에 맞서 편집자적인 삶을 살았다.

1980년 미국 일리노이주 락포드에서 태어난 아블로는 위스콘신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일리노이 공대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패션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힙합 가수 예(Ye·칸예 웨스트의 새 이름)의 앨범 디자인을 담당하며 패션계에 눈을 떴고, ‘파이렉스 비전(2012)’과 ‘오프화이트(2013)’ 등을 출시해 고급 스트리트 패션의 영역을 개척했다. 2018년에는 프랑스 명품 루이비통의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다.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그룹 164년 역사상 흑인이 디렉터 자리에 오른 건 처음이었다. 2009년 아블로가 예와 펜디에서 인턴십을 할 때 펜디의 CEO로 인연을 맺은 마이클 버크 루이비통 회장은 “펜디 시절 그가 새로운 분위기를 불어넣는 방식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며 “지금의 아블로는 클래식과 모던을 잇는 다리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확실히 아블로는 전통적인 디자이너들과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기존의 디자이너가 패턴과 재단에 능한 장인의 모습이라면, 그는 미디어를 조합하고 편집해 새롭게 창조하는 편집자(editor)에 가까웠다. DJ로도 활동했던 그는 여러 문화와 사고를 접목하는 것을 창작의 핵심으로 삼고, 자신을 디자이너가 아니라 ‘메이커’라고 소개했다.

아블로는 원본을 3%만 수정하면 완전히 새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3% 접근법(3 percent approach)’을 주창했다. 파이렉스 비전 시절엔 재고떨이 행사에서 반값(40달러, 약 4만7000원)에 산 랄프로렌 셔츠에 ‘PYREX 23’이라는 프린트를 붙여 550달러(약 65만원)에 되팔았다. 일각에선 그를 사기꾼이라고 비난했지만, 그에게 이는 소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한 개념 미술가 마르셀 뒤샹의 문법과 다를 바 없었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 이민 1세대로 루이비통의 첫 흑인 수석디자이너가 된 버질 아블로. 사진 루이비통
아프리카 가나 출신 이민 1세대로 루이비통의 첫 흑인 수석디자이너가 된 버질 아블로. 사진 루이비통

3%만 바꾸면 새로워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창작 방식은 ‘세상에 옷이 더 필요한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옷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아블로가 고안한 해결책은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뭐든 다르게 보이도록 노력했고, 이런 철학을 소비자와 공유했다. 흰 운동화를 개성에 맞게 염색하고 이를 예술품처럼 각자의 소셜미디어(SNS) 채널에 전시하게 한 오프화이트 레디메이드(Readymade)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아블로는 2017년 한 인터뷰에서 “패션은 일종의 농담이다. 나에게 옷은 하나의 큰 예술 프로젝트이자, 패션 뒤에는 다른 맥락을 신경 쓰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캔버스일 뿐”이라고 말했다.

많은 패션 디자이너가 신비주의를 고수하지만, 아블로는 인터넷을 사용해 창작과 소통 방식을 탐구했다. 잡지 광고 대신 인스타그램으로 고객과 소통하고, 심지어 직원을 고용할 때도 인스타그램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냈다. 또 많은 브랜드와 협업했다. 나이키·이케아·에비앙·맥도널드·벤츠 등 다양한 산업군의 브랜드와 협업해 뉴욕타임스로부터 ‘르네상스 맨’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특히 나이키의 운동화 10종을 재해석한 ‘더 텐 프로젝트’는 신상품이 출시될 때마다 전 세계 스니커헤드(Sneakerhead·운동화 수집가)들을 열광시켰다. 나이키의 클래식 운동화에 오프화이트 특유의 헬베티카 서체로 문구를 새기고, 주황색 케이블 타이를 맨 운동화들은 리셀(Resell·재판매) 시장에서 정가보다 비싸게 거래됐다. 아블로가 사망한 후엔 2017년에 협업한 ‘오프화이트X에어조던 1’의 가격이 정가(190달러·약 22만8950원)의 40배가 넘는 8000달러(약 964만원)까지 급등했다.


흑인 모델과 학생 관객으로 채운 패션쇼

2018년 6월 28일 열린 아블로의 루이비통 데뷔 패션쇼는 현대 패션사에서 기념비적인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됐다. 백인 일색이던 무대에 20여 명의 흑인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과 직업을 가진 모델을 세우고, VIP로 가득 찼던 객석 절반을 패션 전공 학생으로 채웠다.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허용됐던 명품의 관행을 비틀고 패션의 민주화를 실현한 것이다.

순백의 슈트와 속이 비치는 코트, 액세서리와 의류의 경계를 허문 하네스(Harness·안전띠) 등을 선보인 아블로는 피날레에서 오랜 친구인 예와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You can do it too(너도 할 수 있어)”라는 글을 게재했다.

아블로는 모든 활동에서 다양성과 문화를 뛰어넘는 포용성을 강조했다. 한국 문화에도 애정을 보였다. 아이돌 송민호를 패션쇼 무대에 올리는가 하면, 혁오밴드의 노래를 패션쇼 배경 음악으로 활용했다. 2019년 만국기를 활용한 패션쇼를 선보였을 때는 “가장 좋아하는 국기”라며 태극기를 눈에 띄는 곳에 배치했다. 지난 7월에는 루이비통의 홍보대사(앰배서더)인 BTS(방탄소년단)를 내세운 패션쇼 영상을 선보였다.

아블로가 선보인 모든 것은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시대정신이었다. 오랫동안 흑인을 배제해온 루이비통이 아블로를 영입한 이유도 그것이 현대적 사고와 생활 방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아블로는 외부자로서 자신의 디자인이 타당하다는 걸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1년에 35만 마일(약 56만㎞) 이상을 비행할 만큼 바쁘게 살았다. 2019년 심장혈관육종 진단을 받은 후에도 일에 묻혀 지냈다. 그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17세의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며 예술이 미래 세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뉴욕타임스는 샤넬의 디자이너로 멀티태스킹적인 삶을 산 카를 라거펠트에 빗대 아블로를 ‘밀레니얼 세대의 카를 라거펠트’라고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