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평균수명은 20년. 1970년 미국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3분의 1이 세계무대에서 사라지는 데 단 13년이 걸릴 정도로 기업의 수명은 짧다. 무한경쟁시대에 100년 이상 장수한 기업들은 어떤 점이 다를까. 금전등록기에서 시작해 최첨단 정보화 기업으로 변신한 NCR은 12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물론 그 역사가 얘기해 주듯 숱한 위기 과정이 있었다. NCR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셜리 버드(Shelley Bird) 커뮤니케이션 총괄로부터 들었다.
 NCR은 수많은 위기에 적절히 대응하며 현재는 데이터웨어하우징(DW), 금융 및 점포 자동화 등을 위한 IT기업으로 성장했다. NCR(National Cash Register)은 이름 자체가 말해 주듯이, 처음엔 상점에서 활용하던 금전등록기를 만들던 기계제조회사였다. 1957년에는 제너럴 일렉트릭(GE)과 합작으로 대형컴퓨터를 생산했으며, 이는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 뒤 1990년대까지는 내로라하는 중대형 컴퓨터회사의 반열에 서 있었다. 그러다 1990년대에 소프트웨어 전문회사로 업종을 바꿨다. NCR의 변신에 가장 큰 획을 그은 건 1993년 71억달러에 AT&T에 합병된 사건이다. 당시 자금력을 가진 AT&T가 컴퓨터 사업부문을 신설하기보다는 나름대로 기술력을 가진 NCR을 합병해 컴퓨터 사업부문으로 활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합병은 역사상 최악이었다는 평가다.

 1997년 AT&T에서 분리된 NCR은 한 해 동안 대폭적인 조직개혁을 단행하고 업종을 전환했다. 경리·인사 등 지원부서의 인원을 대폭 축소하고 영업부문을 강화했다. 또 5개 사업부에 별도의 영업기능을 추가해 각 사업부의 손익 책임을 보다 명확히 했다. 이윤이 많이 남지 않는 컴퓨터 하드웨어 생산은 설계인력만 일부 남기고 모두 매각하고, 소프트웨어 사업 중심으로 재편했다.

 버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총괄은 “당장은 힘들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에 다른 회사보다 먼저 새로운 업종을 선보였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장수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첫 번째 위기 1 불량률, 사원 복지로 해결



 NCR은 1884년 존 패터슨(John H. Patterson)이 오하이오 주 데이튼 시에 창립한 회사이다. 그는 현금등록기를 만들어 첫 해 5000달러가량의 이익을 냈다. NCR은 1890년대 어려운 여건을 헤쳐 나가던 상황에서 커다란 난항에 부딪혔다. 당시에는 중대한 위기로 여겼으나, 나중에 돌이켜보니 ‘어려움을 가장한 축복’이었다는 게 패터슨 사장의 회고였다고 한다. 그 커다란 난항이란 영국으로 선적되어 나가던 현금등록기의 외환용 합산 장치에서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 것이다. 1894년 약 5만달러에 달하는 제품이 데이튼 공장으로 반품됐다. 이런 중대한 위기에 직면한 패터슨 사장은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공장 내로 집무실을 옮기는 등 즉각적으로 대응해 나갔다.

 공장을 돌아본 후  패터슨 사장은 당시 공장 상황이 근로자의 생산성과에 영향을 미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공장을 청결하게 하고 화장실과 목욕시설을 갖추도록 했다. 그 결과 남직원은 일주일에 두 번 목욕을 할 수 있게 됐으며, 여직원은 등 부분 조정이 가능한 편안한 의자를 제공받았다. 건물 옥상에는 여직원용 방을 따로 만들어 기계 옆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 회사에 수익이 나지 않을 때라도 직원들의 월급을 인상했다. 이런 조치 하나하나가 NCR 직원들의 직장 내 근무조건과 삶을 개선하기 위해 진행될 대대적 캠페인의 출발점이 됐다.

 회사가 난관에 봉착하기 전까지 패터슨 사장의 주요 관심사는 판매조직의 육성, 제품의 설계 사양 개선, 미국 내외 마케팅 확산 등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위기를 계기로 패터슨 사장의 최대 관심사는 ‘공장 근로자’로 바뀌게 되었다. NCR이 점차 성장해 나가면서 ‘회사의 힘을 키울 수 있게 한 건 사람’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회사가 난관에 봉착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공장의 청소, 임금 인상 및 기타 개선 조치를 단행한 이후에 패터슨 사장은 당시로는 가장 최신형 공장을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건축사에게 이번에는 “거의 모든 면이 모두 유리로 된 건물을 설계”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건축사는 그런 건물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결국 패터슨 사장은 새로운 공장에 구조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유리를 세울 수 있는 설계자를 직접 찾아 나서야 했다. 마침내 유리로 제작된 최초의 공장이 건설됐고, 1층부터 천장까지 창문을 열 수 있어 햇빛뿐 아니라 신선한 공기까지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이렇게 유리로 제작하는 사무실의 설계 방식은 현재 데이튼에 위치한 NCR의 세계본부 건물에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1894년에 세워진 새 공장은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이고 안전성을 고려한 공장이었다. 모든 기계를 밝은 색(녹색)으로 칠하고, 먼지를 흡수하도록 기계 덮개를 마련했다. 만들 수 있는 최대한으로 모든 안전장치를 설치했고, 최상의 화장실과 라커룸, 여성 전용 화장실, 병원 및 양호 시설, 의료검진 시설을 갖췄다. 여직원에게는 무료로 깨끗한 앞치마와 소매씌우개를 제공했다. 그 이후에 건축된 모든 건물들도 직원의 안전과 편안함을 고려해 설계했다.

 데이튼 지역 사회에 있는 일부 기업가들은 패터슨의 이러한 배려가 직원들의 ‘응석을 받아 주는’ 처사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이런 비난을 고려해 보면, 그가 펼쳤던 사원 복지에 대한 생각이 어땠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또 직원들이 상사에게 의견을 제안하고 건의를 올릴 수 있도록 자필 등록부를 회사 곳곳에 설치했다. 6개월마다 최우수 의견과 업무 개선에 대한 최우수 제안을 선정해 500달러 상당의 금을 각각 지급했다.

 특히 NCR의 300명에 달하는 여직원에 대한 대우는 주목을 받았다. 여직원은 남직원보다 한 시간이 늦은 오전 8시에 출근하고, 더 많은 휴식시간을 가졌으며, 퇴근시간도 남직원보다 15분이 빨랐다.

 패터슨 사장은 “여직원의 근무시간을 이처럼 대폭 줄였지만, 그들의 작업량은 예전에 10시간을 계속 일했던 때와 동일하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의 배려에 대해 직원들은 일을 더 빨리, 더 잘하는 것으로 되돌려줬고, 그 결과 기업의 수익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고 언급했다.

 1894년에 결혼 6년 만에 부인과 사별하고, 남북전쟁 전후로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은 뒤로 패터슨 사장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한다”는 철학이 새겨졌다고 한다.



 두 번째 위기2 외부의 열악한 경제상황에 과감히 도전



 창립 초기 30년 동안 NCR은 세계시장에 진출했지만, ‘1893년의 경제공황’ 이후의 경기침체와 세계대전 등 험난한 역경을 두루 거쳤다. 1917년까지 NCR은 전 세계의 현금등록기시장의 95%를 차지했고, 미국에서 선두기업 중 하나로 손꼽혔다. 1917년 <포브스>는 패터슨 사장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리더 5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미국 및 전체 시장에서 NCR의 새로운 제품에 대한 수요 창출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당시 NCR은 어느 때보다 외부 상황과 더욱 긴밀하게 연관돼 있었다. 1929년 10월에 주식시장의 폭락을 가져온 ‘대공황’ 이후 10년 동안 열악한 경제상황이 이어졌고, 또 제 2차 세계대전은 다국적 기업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22년 패터슨 사장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프레드릭(Frederick)이 회사를 책임지게 됐다. 창립자였던 패터슨은 동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으며’, 이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믿던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1922년에 NCR을 이끌었던 주요 인물인 알린(Stanley C. Allyn, 당시 기업 감사관) 이사는 회고록에서 프레드릭 사장이 이전 제품보다 정교한 현금등록기 ‘Class 2000 정산기’를 내세워 NCR의 대규모 다각화 노력을 진두지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21년에 NCR의 매출은 2900만달러이고, 그 중 수익은 280만달러에 달했다. Class 2000의 판매에 힘입어 1925년까지 매출은 4500만달러로, 수익은 780만달러로 증가했다. 1920년대 중반에는 불과 1000만달러의 매출만 올려도 ‘초대형’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NCR의 입지는 매출과 제품 확장에서 절정기를 맞았다.



  세 번째 위기3 컴퓨터를 미래성장 동력으로



  1970년대 NCR은 전자데이터 처리기술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그 기술이 업계를 장악하던 시기였다. NCR은 “85년 된 현금등록기가 컴퓨터와 경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루어진 기술의 진보로 진기한 신제품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 컴퓨터는 일종의 패러독스와 같은 존재였다. 컴퓨터를 최초로 적용한 사례는 과학 분야에서 ‘대량의 수치 계산’을 하기 위해서였다. 상업용 컴퓨터시장은 1953년에 등장했지만, 2년 후에 미국 전역에 설치된 컴퓨터 기반의 가치는 2억5000만달러에 불과했고,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시장이 지극히 제한적인 상업용 시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1984년까지 상업용 컴퓨터 기반은 무려 1460억달러에 달했다.

 1950년대 초반에 NCR은 다시 한번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NCR이 ‘전자데이터 처리 분야에 진입해야 하는가’라는 게 그것이다. ‘만일 그렇다’라면, 이는 수백만달러의 연구 및 개발 관련 비용이 소요돼야 하며, 또한 제조업, 마케팅, 서비스 담당직원을 다시 뽑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만일 그 대답이 ‘아니다’라고 하더라도, 미래의 기업 성장이 지극히 제한적일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런 중차대한 질문에 NCR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1952년에 NCR이 캘리포니아의 호톤(Hawthorne)에 위치한 신생기업인 컴퓨터리서치코퍼레션(CRC)를 인수하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CRC는 1953년에 NCR의 전자제품 본부가 됐다. CRC는 2극 진공관(다이오드)을 사용해 진공튜브의 수를 획기적으로 감소시켰다. 이를 통해 NCR은 당시 신생 컴퓨터산업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과 전력으로 컴퓨터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전자제품에 점차 관심이 집중되긴 했지만, 1950년대 NCR 경영진 대부분의 관심은 전기기계식(electro mechanical) 제품의 추가 개발과 제품의 전 세계 확장에 쏠려 있었다.

 NCR의 기존 제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생산시설 및 마케팅 부서는 계속 확대일로였다. 1953년까지 NCR은 10곳의 설비제조 공장과 함께 기타 공급품의 생산 및 유통을 위해 여러 개의 공장을 운영했다. 영업 사무소를 신설했으며, 이미 거대한 규모였던 데이튼의 생산단지에 제조공간을 추가해서 늘렸다. 1954년에 NCR의 기업수익은 지난 10년보다 거의 네  배나 증가했다.



 네 번째 위기4 기술혁신으로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



 미래성장 동력으로 삼았던 컴퓨터사업에서 네 번째 위기가 닥쳐왔다. 1961년에 알린 회장인 48년 동안 몸담았던 NCR을 떠나면서 그의 후임으로 오엘만(Oelman)이 선출됐다. 오엘만 회장은 NCR을 기존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도 동시에 컴퓨터시장에 더욱 주력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대내·외적으로 난항에 부딪혔다.

 NCR의 사보인 <NCR팩토리뉴스> (NCR Factory News)에 기고한 오엘만 회장이 직원들에게 전달한 첫 번째 메시지는 ‘비즈니스를 계속 따라잡기’라는 제목의 칼럼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NCR의 컴퓨터 대여사업의 비용 상승에 관한 것이다. NCR은 1960년에 700만달러를, 1961년에는 1330만달러를 투자했고, 그리고 1962년에는 대여한 컴퓨터와 관련 설비를 만들거나 설치하기 위해 2650만달러를 지출할 계획을 세웠다. NCR은 이런 필요자본을 충당하기 위해 감채(減債)기금 채권과 일반 주식을 추가 발행했다.

 하지만 컴퓨터와 기존의 정산기 제품 판매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초기의 컴퓨터 판매는 주로 데이튼 사무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후에 컴퓨터 판매는 대규모 지점 사무소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런 지점 사무소는 컴퓨터와 NCR의 자체 정산기 매출을 놓고 경쟁하는 곳이었다.

 업무를 위임받은 영업사원은 정산기와 컴퓨터를 동시에 판매했고, 컴퓨터 전문가가 영업사원에게 기술 지원을 제공했다. 컴퓨터는 영업사원의 근무시간 중 75%를 차지하지만, 영업수익의 25%를 창출할 뿐이었다.

 컴퓨터 영업사원은 컴퓨터 판매 등에 따른 비용이 높기 때문에 정산기에서 얻는 이익만큼 컴퓨터사업에서 이익을 낼 수 없었다. 또 컴퓨터에 대한 교육비 지출, 부품과 보수·유지·설비에 대한 많은 투자로 인해 기존 제품의 판매 매출 이익은 사실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전세가 역전됐다. 그것은 기술혁신 때문이었다. NCR이 1960년대 말에 새롭게 선보인 통합회로 기술을 통해 컴퓨터의 처리 속도는 상당히 빨라졌고, 컴퓨터의 필요 성능과 크기 및 비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통합회로의 도입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지난 85년 동안 NCR의 성장을 이끌었던 전자기계식 업무용 기계가 완전히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 셈이다.

 1960년대 말까지 전기기계식 제품 판매가 여전히 호황을 누렸으나, 제품의 높은 비용으로 인해 이익의 상당 부문을 소진해야 했다. 수익은 1960년에 4억5800만달러에서 1968년에 11억달러로 증가했지만, 1968년 현금 배당금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전반에 걸쳐 NCR의 총 수익에서 전자제품이 창출하는 수익 비중은 여전히 얼마 되지 않았다. 1962년 수익의 3%는 데이터처리 설비 판매와 대여에서 창출됐다. 1965년에 이르러 그 수치는 6%로 두 배 증가했고, 1968년에는 다시 거의 두 배가 증가해 수익의 11%를 차지했다. 하지만 1971년까지 여전히 수익의 15%에 불과했다.

 NCR은 전자설비 관련 대여사업에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계속해서 대출을 받았고, 그 결과 이자비용이 총 수입에 악영향을 끼쳤다. NCR은 1968년에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 중 수익 부문에서 89위를 차지했지만, 판매율 대비 이익 부문에서는 334위를 차지했다. 직원당 수익은 1만1374달러에 불과했으나, 직원 고용은 계속 증가했다. 1년 후인 1969년에 고용인원은 10만2000명에 육박했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지만, 1969년에 NCR 제품은 해외에서 판매 기록을 세웠다. 전자데이터 처리설비의 판매고가 무려 70%가 상승한 것이다. 한때의 위기가 새로운 기회가 된 것이다.



 다섯 번째 위기 5 내부혁신을 통해 하향 이익을 역전



 1972년 5월 NCR 이사회는 신임 사장과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선임해야 했다. 1962년에서 1976년까지 중역을 지낸 조지 하인스(George Haynes) 전 수석 부사장은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이익을 상향 추세로 역전시킬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다. 우리는 그 적임자가  내부 직원 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 설명했다.

 당시 전 세계 진출한 45개 NCR 조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NCR Japan은 가장 많은 수익을 내고 있었다. 윌리엄 앤더슨(William S. Anderson)은 NCR의 극동지역 운영을 담당하면서 당시 NCR Japan 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사회는 앤더슨 회장의 지휘 아래 NCR Japan이 전자제품의 홍보·개발·마케팅 업무를 매우 공격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1972년에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앤더슨을 NCR의 신임 사장으로 선택했다. 또한 이듬해 그를 CEO(최고경영자)로 선임했다.

 신임 앤더슨 사장이 처음 해결해야 할 난제는 ‘수익 하향 추세를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앤더슨 사장은 그 즈음 NCR이 하고 있던 거의 모든 업무와 이들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 정책 및 절차를 뜯어고치기로 했다. 그는 NCR의 미래성장과 수익성이 컴퓨터시스템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앤더슨 사장은 메인프레임(대형컴퓨터)에서의 생존이 ‘결정적 사안’ 이고, NCR의 미래가 메인프레임사업에 계속 머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달렸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NCR 외부에서는 그런 가능성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72년에 이르러 GE 등이 컴퓨터 분야에서 철수한 이후로 이런 회의적인 견해는 절정에 달했다. 이에 앤더슨 사장은 NCR이 컴퓨터 분야에서 앞으로도 건재할 거라는 걸 내·외부에 확신시켜야만 했다. 그는 이를 위해 모든 전기기계식 제품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다. 그 결과 쓸모없게 된 기계와 부품 등을 폐기처분하는 데 든 비용이 6000만달러에 달했다. 이는 1972년에 발생한 NCR 순손실분의 주요 원인이 됐다. 1932년과 1933년의 경제 대공항 이후 처음으로 NCR은 1972년에 적자운영에 처했다. 그럼에도 1972년에 수익은 소폭 상승했고, 그 해에 향후 NCR의 수익 구조를 마련해 줄 주요 신제품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1960년대에 시작한 집중화 제조방식도 완전히 분산된 제조방식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생산시설을 재배열하고, 각 공장은 특정 유형의 제품 생산을 전문으로 하게 됐다. 또 신속한 제품 개발과 비용 절감을 위해 각 분야에 대한 엔지니어링, 개발 개선 및 지원 기능과 각 공장 단위의 제조운영 방식을 통합했다.

 이와 동시에 NCR의 제품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부품을 자체 생산하기보다는 외부 공급업체로부터 구매하기 시작했다. 외부 공급업체들은 부품을 대규모로 생산하기 때문에 필요한 부품을 훨씬 더 경제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자체 생산을 통한 비효율성을 없앤 것이다.

 노동집약적인 제품의 생산 중단으로 공장 인력도 빠른 속도로 줄여나갈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고용이 절정에 달했던 1969년의 10만2000명에서 1972년 12월에는 9만명으로 꾸준히 감소했다. 1년 후에 그 수치는 또다시 9000명이 감소했다. 가장 큰 규모의 공장이 있던 데이튼이 특히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이런 NCR의 구조조정은 ‘중산층의 몰락’으로 불릴 정도로 지역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컸다.

 연구, 개발, 생산 등에 대한 방향을 재정립하는 노력과 더불어 1973년 NCR은 마케팅 조직을 ‘직업화(vocationalize)’하기 시작했다. 직업화는 마케팅 담당자에게 전문적으로 특정 업무 분야를 맡겨 그들의 교육을 간소화하고 지식과 경험을 증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약 1000명이 넘는 마케팅 담당자의 인사이동, 판매교육의 대대적인 변화, 마케팅 정책과 절차에 대한 수백건의 개정, 판매 인센티브를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해 설계된 새로운 보상계획 등 엄청난 규모의 사업에 착수했다. 앤더슨 사장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어도 제대로 된 결과를 낼 수 없다’는 생각에 기업의 내부정보 시스템을 신속하게 개혁한 것이다.

 이런 구조조정을 통해 1970년대 말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1978년과 1983년 사이 연간 16%씩 증가하는 연구개발(R&D) 지출에 대해 자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NCR은 1981~1982년의 경기침체기 동안 연구개발 분야에 투자해 대형컴퓨터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게 됐다.



 여섯 번째 위기 6 AT&T와의 합병이 가장 큰 위기



 NCR은 1990년대 초대형 통신기업인 AT&T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990년 말에 AT&T는 NCR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주식 매입 제안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NCR 이사회는 그 제안 금액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AT&T는 세계화 노력을 가속하는 상황에서 NCR이 전 세계 130개 이상의 국 가에 진출해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AT&T가 NCR의 주주들에게 높은 가격대를 제시하면서, 1991년 5월 AT&T와 NCR은 NCR 구매에 대한 합의에 서명하기에 이른다. NCR과 AT&T는 1991년 9월, 75억달러에 달하는 거래로 합병했다. 하지만 이것은 AT&T 최악의 인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AT&T는 이 거래로 인해 40억달러의 손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그 해 NCR은 기존 비용의 10분의 1 비용으로 기존 메인프레임보다 네 배나 성능이 높은 상업용 컴퓨터 ‘3600’을 출시했다. 또 1991년 12월에 NCR은 테라데이타(Teradata Corporation)와 합병하면서 새롭게 부상하는 데이터웨어하우징(DW) 분야에서 선두기업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한 예로 거대 소매기업인 월마트(Wal-Mart)는 전 세계에 분포한 매장의 매출을 추적하고 효과적으로 재고를 관리하기 위해 NCR의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1995년 AT&T가 대규모의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면서 NCR도 분리됐다.  합병된 지 5년 만의 일이다. 하지만 AT&T에서 분리된 NCR은 1996년 12월 큰 홍역을 치렀다. 중형컴퓨터 분야에서 가격하락과 경쟁업체들의 거센 공세로 4000만달러의 적자를 보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이다. 이런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NCR은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주요 컴퓨터공장 세 곳을 일렉트론에 매각하고, 1200명의 직원도 같이 고용승계하기로 했다.

 2000년대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2002년 NCR은 2억달러의 손실을 냈다. 편의점의 ATM과 같은 신규 사업에 늦게 뛰어들었고, 표준화된 기술 도입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이런 NCR의 가장 최근의 위기를 극복한 이가 바로 칼리 피오리나 후임으로 현재 휴렛패커드(HP)의 CEO를 맡은 마크 허드였다.

 허드는 지난 1980년 NCR에 입사한 뒤 25년간 이 회사에 재직해 왔다. 마케팅 임원, COO 등을 두루 거친 그는 2003년 3월 NCR의 CEO에 임명됐다. 허드는 지난 2년간 NCR을 이끌면서 이룩한 성과에 대해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CEO로 임명되고 나서 1500명을 해고했다. NCR은 허드 사장의 구조조정과 비용절감 노력 덕에 지난해 매출 56억달러, 이익 5800만달러로 다시 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NCR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주요 사업인 데이터웨어하우징과 ATM, 계산대기기(POS)의 시너지효과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데이터웨어하우징은 강력한 경쟁자인 오라클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며, POS는 델이 시장에 진출한 것이 가장 큰 우려다. 금융권과 유통업의 거래자동화서비스가 폭발적으로 대두될 것이라는 NCR의 미래 비전도 아직 불투명한 상태다.

 셜리 버드는 “120년 동안 많은 위기가 있었으며, 앞으로도 위기를 맞게 될 거라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런 위기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NCR은 대담하게 맞서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했다.



 NCR 테라데이타 컨퍼런스

 ‘가능성의 경험’ 미리 맛보다



 국 플로리다 반도 중부에 위치한 54개의 호수, 47개의 공원을 가진 올랜도(Orlando)는 ‘더 시티 뷰티플(The City Beautiful)’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는 중소도시다.

 올랜도는 1970년대에는 오렌지 생산이 주요 산업이었지만, 지금은 하이테크산업이 급성장해 850개의 관련 기업이 이 지역에 공장을 갖고 있다. 또 미국 우주항공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표적인 산업은 역시 관광산업으로 1983년에 월트 디즈니월드가 개장된 이래 관광지로, 컨벤션(Convention) 도시로 발전해 왔다. 올랜도는 면적이 서울의 5분의 1 정도 되며, 한마디로 말해 엔터테인먼트 왕국으로 연간 3000만명이 찾는 세계 최대 리조트타운이다.

 9월18일부터 22일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데이터웨어하우징 컨퍼런스인 ‘테라데이타 파트너즈 컨퍼런스’가 열린 곳은 다름 아닌 디즈니월드였다. 테라데이타는 NCR 매출(58억달러)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부로, 2004년 매출은 12억달러였다. 테라데이타의 데이터웨어하우스(DW)는 기업의 현재와 과거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보관소로서, 이 데이터를 통해 비즈니스를 분석하고, 더 나은 의사결정을 보다 빨리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제품이다. 테라데이타는 월마트, 뱅크오브아메리카(BOA), 페덱스(FedEx), 미국 국세청 등 전 세계 500개사 고객을 보유하고 있다.

 ‘가능성의 경험’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컨퍼런스에는 미국·유럽·중남미·중국·일본 등 40여개 나라에서 파트너와 고객 등 3000여명이 참석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첫째 날 기조연설에 나선 마이클 코엘러(Michael F. Koehler) 테라데이타 수석부사장은 “이번 컨퍼런스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고객들이 참석했다”며, “데이터웨어하우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흥분했다. 지난 8월 선임된 빌 누티 CEO는 회사 방침에 따라 선임 후 3개월 동안 대외활동을 자제하기로 해, 코엘러 수석 부사장이 이번 행사의 기조연설을 맡았다.

 그는 “2006년이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활용해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기업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며, “실시간기업이 그 분야의 리더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시간기업이란 IT기술을 활용해 의사결정을 위한 각종 정보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활용하는 기업을 의미한다.

 자칫 따분해지기 쉬운 컨퍼런스의 기조연설은 시작과 중간에 무용과 노래가 곁들여지면서 코믹한 상황이 연출돼 연설 시간에 청중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첫째 날 오후에는 지난 4년간 데이터 트렌드에서 의사결정을 위해 필요한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연간 1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고 있는 대기업의 중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번 설문조사에서 71%의 기업들이 의사결정에 필요한 데이터의 양이 놀랄 만큼 급증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중 98%는 지난해에 비해 의사결정이 매우 복잡해졌다고 밝혔다.

 코엘러 부사장은 “현재 기업들은 복잡하고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이터의 홍수에 허덕인다.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인해 타격을 입는 것은 바로 매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컨퍼런스가 열린 사흘 동안 상하이주식거래소, 뱅크오브아메리카, DHL 등의 기업과 엑센츄어, 딜로이트컨설팅 등 협력사들은 180여 발표와 전시를 개최했다. 밥 페어 테라데이타 최고마케팅경영자(CMO)는 “테라데이타의 협력사들은 이번 컨퍼런스의 주제처럼 데이터와 관련한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40여개 나라에서 온 NCR테라데이타 협력사 전시회에는 제품 시연 등을 통해 데이터웨어하우스의 미래 기술 진보를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 고객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얼음 당구대, 풋볼 골인 시키기 등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했다.

 컨퍼런스 참가자들이 대부분 참여한 마지막 날 이벤트도 압권이었다. 유니버셜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이벤트는 참가자들을 한 덩어리로 뭉치게 만들었다. 유럽, 대만, 일본 등의 참가자들도 짜릿한 놀이기구를 타거나, 쇼를 관람하면서 국적을 불문하고 너나없이 어울렸다. 다이안 테리씨는 “미국인도 디즈니월드에 오는 게 쉽지 않다. 디즈니월드에 오기 위해  1년 정도 돈을 모아야 한다”며 놀이기구에 흥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