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상 서울시 무형문화재, 농림축산식품부 식품명인
김택상
서울시 무형문화재, 농림축산식품부 식품명인

증류 직후 위스키는 그냥 마시기 어렵다. 알코올 향만 남아 있는 탓에 맛이 거칠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크통에 넣어 몇 년간 숙성시킨 뒤 상품화하는 게 일반적이다. 오랜 시간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치면 무색의 술 색깔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호박색으로 변한다. 의도적으로 나무 향과 색상을 넣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10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한 위스키보다 더 부드러운 전통술이 있다. 우리 쌀로 빚어 증류한 증류소주다. 숙성도 거의 하지 않았다. 서울을 대표하는 우리 술, 삼해소주가가 그 주인공이다. 얼마 전 전통주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서 화제가 된 방송인 정준하씨가 ‘가장 좋아하는 술’로 꼽았던 술, 도수 낮춘 제품을 따로 만들어달라는 청와대 요청을 거절한 술이기도 하다.

삼해소주를 만드는 김택상 명인을 만나러 서울 북촌의 삼해소주가 공방을 찾았다. 북촌이 ‘관광특구’라는 이유로 양조장 허가를 받지 못해 공장은 경기도 안양에 있고, 이곳은 시음장을 겸한 공방만 있다. 그는 대를 이은 양조인이다. 어머니 이동복 여사는 1993년 무형문화재(삼해주 제조)로 지정됐다. 아들인 그도 24년 후인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선정하는 전통식품명인 제69호로 지정됐다.


삼해소주가의 제품 6종. (왼쪽부터)삼해고, 삼해귤, 삼해국, 삼해포, 삼해소주, 삼해귀주. 사진 삼해소주가
삼해소주가의 제품 6종. (왼쪽부터)삼해고, 삼해귤, 삼해국, 삼해포, 삼해소주, 삼해귀주. 사진 삼해소주가

숙성을 별로 하지 않은 삼해소주가 수년간 숙성시킨 위스키 이상으로 부드러운 이유는 뭔가?
“첫 번째 이유는 발효 시간의 차이다. 숙성기간은 위스키에 비해 삼해소주(3개월)가 매우 짧지만 반대로, 항아리에서 익어가는 발효 시간은 삼해소주가 훨씬 길다. 위스키 증류 전 단계인 맥주를 만드는 발효 시간은 매우 짧다. 하지만 삼해소주를 증류하기 위해 그 전 단계로 만드는 삼해약주는 발효 시간만 100일이 넘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108일간의 발효를 거친다. 술의 맛과 향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증류가 아니라 발효 공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정성’이다. 삼해주는 이름 그대로 세 번 술을 담글 정도로 정성을 들인 술이다. 삼해주라는 이름은 양조 방법에서 땄다. 삼해주에는 석 ‘삼’ 자와 돼지 ‘해’ 자가 들어 있다. 음력 정월 첫 돼지날(해일)에 밑술을 담근 뒤 36일 후인 2월 돼지날에 또 덧술을, 또 36일 후인 3월 돼지날에 세 번째 덧술을 첨가한다. 그래서 삼해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삼해주는 마지막 덧술을 한 3월 돼지날 기준, 또다시 36일을 기다렸다가 4월 돼지날에 항아리를 개봉한다. 이것이 삼해탁주이고, 이 중 위에 뜨는 맑은 술인 약주만 따로 떠서 증류를 거치면 삼해소주가 완성된다. 그만큼 발효에 정성을 기울인 술이기 때문에 증류하더라도 맛과 향이 부드럽다는 얘기다. 그래서 공방을 찾아오신 분들이 ‘10년 이상 숙성시킨 위스키와 3개월만 숙성한 삼해소주 맛을 비교해보면, 삼해소주 맛이 더 낫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어느 외국인 한 분은 ‘꽃봉오리(삼해소주)를 삼켰더니 배 속에서 꽃이 활짝 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연예인 정준하를 비롯해 삼해소주 애호가들이 많다.
“유명 만화가 허영만 화백이 지난겨울에 공방에서 시음하고는 극찬의 말씀과 함께 내 커리커처까지 그려주셨다. 그때 정준하씨도 같이 왔다. 7080 가수인 김세환씨도 공방을 찾아와 삼해주 시음을 했다.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 대사는 이곳 공방에 오지는 않았지만 두 차례 대사관저 행사 때 삼해주를 내놓았고, 나도 그때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삼해소주가 청와대 만찬주에 선정된 적은 있는가?
“청와대 쪽에서 비공식적으로 전해온 얘기는 ‘삼해소주를 청와대 만찬주로 쓰고는 싶으나 알코올 도수(삼해소주는 45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도수를 낮추어 줄 수 없겠느냐’는 얘기였다. 가령, 미국 트럼프 대통령 같은 경우는 술을 잘 못 마시니까 삼해주 같은 고도주는 내놓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명색이 전통식품명인인데, 제품의 도수를 억지로 낮출 수는 없었다. 도수를 낮추려면 결국 물을 타야 하는데, 이는 삼해주의 정체성(물을 한 방울도 타는 않는 증류주)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청와대에는 이런 이유로 삼해주가 만찬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삼해소주가의 주력제품은 삼해소주다. 매출 대부분이 이 제품 하나에서 나온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주 전문점인 백곰막걸리를 비롯해 전통주 전문점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제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김택상 명인은 다양한 우리 농산물을 물 대신 사용한 ‘뉴 버전’ 삼해주를 만들고 있다. 우선, 물 대신 포도즙을 사용해 빚고 증류한 삼해포(알코올 도수 50도) 소주가 있다. 물 대신 한국산 캠벨 포도를 짠 즙에 쌀과 누룩으로 빚은 발효주가 삼해포 약주, 이를 증류한 술이 삼해포 증류주다.

삼해소주가는 술을 ‘법고창신’ 정신으로 만든다고 들었다. 무슨 뜻인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얘기한 ‘법고창신’은 공자가 얘기한 ‘온고지신’보다 창조성을 더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온고지신은 가능한 한 옛것을 유지하자는 것이고, 법고창신은 옛것을 유지하되,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술병 디자인도 전통적인 도자기가 좋지만, 현대 들어서는 그것만 고집할 이유는 없다. 사람 체형도 바뀌고 음식 맛도 바뀌는데, 조선시대 제조법이나 병 모양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삼해주의 전통적인 양조 기법(정체성)을 토대로 하되, 현대적인 감각을 더해, ‘살아 있는 전통’을 실현(재창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법고창신의 대표적 사례가 삼해소주 이외의 증류주들이다. 삼해주 주재료는 쌀, 누룩, 물이다. 삼해소주는 이 세 가지 재료로 먼저 약주를 만든 뒤 증류를 거쳐 완성된다. 그런데 물 대신, 포도, 귤, 버섯, 국화꽃 등을 사용해 술을 빚어봤다. 그게 삼해포(포도), 삼해국(국화), 삼해고(상황버섯), 삼해귤(귤) 같은 새로운 제품이다. 모두 다 법고창신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래전부터 전해온 삼해주 양조 기법에는 쌀, 누룩, 물만 쓰게 돼 있지만, 우리 땅에서 난 우리 농산물을 물 대신 써보자는 일종의 실험 정신에서 만든 새 창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