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고급 패션브랜드 ‘돌체앤가바나’의 립스틱 신제품(돌치시모) 뷰티 광고. 사진 돌체앤가바나
이태리 고급 패션브랜드 ‘돌체앤가바나’의 립스틱 신제품(돌치시모) 뷰티 광고. 사진 돌체앤가바나

서울 광화문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봉달(34·미혼)씨는 아침 식사를 즉석수프 ‘보노(VONO)’로 해결한다. 회사에 출근해서는 자판기에서 뽑은 조지아 캔커피로 졸음을 쫓고, 제록스 프린터로 문서를 인쇄한다. 봉달씨는 이날 퇴근길에 백화점에 가서 여자친구 생일선물로 ‘돌체앤가바나(D&G)’ 향수와 ‘고디바’ 초콜릿을 샀다.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생일에는 ABC마트에서 아식스 운동화를 사달라고 할 참이다.

집에 도착해서는 지난달 면세점에서 산 ‘짐빔’ 버번 위스키를 꺼냈다. 내일 동창 모임에선 요즘 유행이라는 ‘하이볼’을 마시기 위해서다. 

김봉달씨가 먹고 마시고 구입한 제품의 브랜드는 모두 일본 기업이 소유 혹은 인수 예정이거나 개발을 주도한 것들이다.

국적을 감춘 일본계 자본의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일본 기업은 자국 내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 기업과 합작을 통한 현지화 전략으로 저변을 넓히는 한편, 자국 브랜드 국제화 및 글로벌 유명 브랜드 인수를 통해 한국 시장에 새로이 접근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도 매장이 있는 벨기에 명품 초컬릿 ‘고디바’도 조만간 일본 자본에 인수될 가능성이 커졌다. 11월 17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고디바’의 아시아(한국·일본·오세아니아, 중국 제외) 사업권이 매물로 나왔으며, 유력 인수 후보자로 일본 종합상사인 미쓰비시(三菱)상사가 꼽힌다고 보도했다.

미쓰비시상사는 해운업과 자원 개발 등 중후장대 사업을 해 왔으나, 지난 8월 ‘켄터키 햄’으로 유명한 미국 스페셜티푸드그룹을 인수하는 등 해외 식품 판매 유통 사업 부문을 확장 중이다.

일본 화장품 기업인 시세이도는 2016년 6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인 D&G의 화장품 생산·판매권을 매수했다. 시세이도는 같은 해 프랑스 메이크업 브랜드 로라메르시에(Laura Mercie)와 리바이브(Revive)를 인수했다. 현재 전 세계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D&G와 로라메르시에의 화장품을 시세이도가 생산한다.

앞서 일본 주류 업체인 산토리는 2014년 버번콕(버번+콜라)으로 유명한 미국 증류주 업체인 ‘짐빔’을 인수했다. 일본 후지필름은 올 초 61억달러(약 7000억원)를 들여 복사기로 유명한 미국 ‘제록스’ 인수를 시도했다. 미국 제록스 대주주의 반대로 올해 6월 인수가 무산됐지만, 한국에서 판매되는 제록스 복사기는 이미 일본 제품이나 마찬가지다.

후지필름과 제록스가 아시아·태평양 시장을 위해 설립한 합작법인인 후지제록스의 후지필름 지분율은 75%다.


수십 년 시행착오로 해외 진출 노하우 쌓아

인수·합병(M&A) 외에도 합작회사 설립, 협력계약 등의 방식으로 한국 시장 진출에 성공한 일본 기업도 많다. 2004년 롯데그룹과 손잡고 한국에 진출한 패스트패션 브랜드인 ‘유니클로’, 생활용품 전문점인 ‘무인양품(MUJI)’이 대표적인 일본 브랜드다.

일본 ‘패스트리테일링’과 롯데쇼핑은 2004년 51 대 49의 지분으로 유니클로 수입 판매사를 합작 설립했다. 같은 해 롯데상사는 일본의 ‘양품계획’과 손잡고(지분 40 대 60) 무인양품을 세웠다. 유니클로와 무인양품의 전국 매장은 각각 179개, 26개에 이른다.

운동화 편집숍인 ‘ABC마트’는 일본 ABC마트가 99.96%의 지분을 보유한 일본 기업이다. 전국에 226개 매장이 있다. 부산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비즈니스호텔 체인인 ‘토요코인’도 일본 기업이다. 일본 토요코인이 2004년 100% 출자해 만든 회사로, 서울 동대문 등 전국에서 9개 호텔을 운영 중이다. 호텔 업계 관계자는 토요코인에 대해  “객실 가격이 일반 호텔보다 30%가량 저렴하며, 일본 특유의 세심한 서비스로 한국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일본 브랜드는 일본 색은 최소화하는 대신, 브랜드의 장점은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국내 패션과 생활용품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이장우 이장우브랜드마케팅 회장은 “한국에 진출한 일본 패션 기업은 국적이 아닌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웠다”며 “이는 이념이나 명분보다 제품에 집중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실용주의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분석했다.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 성공 사례는 한국 기업에 시사점을 준다. ‘일본’에 대한 정서적 반감이 큰 한국 시장에 일본 기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은 역으로 한국 기업이 해외 진출할 때 참고할 부분이 많다는 뜻이다.

손성민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 주임연구원은 “시세이도 등 일본 기업의 사례는 케이뷰티(K-beauty)에 의존하는 국내 화장품 기업에 경종을 울린다”며 “‘사드’ 사태에서 봤듯이 국가를 브랜드로 쓰는 것은 국제정치적으로 리스크가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형구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시세이도와 같은 기업은 자신의 정체성을 ‘일본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으로 볼 것”이라며 “한국 기업도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마인드를 제대로 갖는 것이 한층 절실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plus point

조지아, 일본 캔커피 1위 브랜드

한국에서 판매되는 조지아커피. 사진 코카콜라 음료
한국에서 판매되는 조지아커피. 사진 코카콜라 음료

사실 한국 소비자는 이미 알게 모르게 일본 제품에 익숙해져 있다. 중저가형 기저귀 ‘마미포코’는 일본 위생용품 1위 기업 유니참(Unicharm)과 LG생활건강이 합작 설립(지분 51 대 49)한 LG유니참에서 만든다. 농심이 판매하는 즉석수프인 ‘보노’ 수프도 일본 아지노모토(味の素)와 농심이 합작 설립한 ‘아지모도농심푸즈’가 생산한다. 지난해 촉촉한 삶은 달걀 열풍을 일으킨 ‘감동란’도 한·일 합작 회사인 마루카네코리아의 작품이다. 2013년 설립한 이 회사의 연매출액이 지난해 116억원까지 늘었다.

LG생활건강의 손자회사인 코카콜라음료가 생산·판매하는 ‘조지아 캔커피’와 이온음료 ‘토레타’는 일본 코카콜라가 개발한 제품으로 브랜드 사용 등에 따른 비용을 코카콜라 한국법인을 통해 지불하고 있다. 조지아 브랜드는 일본 코카콜라가 1975년 일본 시장에 출시한 이래, 세계 최대 캔커피 시장인 일본에서 캔커피 판매 1위를 달리고 있다. 2015년 대형마트 품절 사태를 빚었던 ‘허니버터칩’은 해태제과와 일본 제과 업체 가루비(CALBEE)가 50 대 50으로 합작 설립한 기업인 ‘해태가루비’ 공장에서 만든다. 제품 자체는 한국 해태제과가 개발했다.

강형구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를 겪었던 지난 20년 동안 일본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해외로 진출했다”며 “글로벌 M&A 시장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은 경험이 현재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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