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파리의 귀족 문화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레스케이프 호텔 객실(왼쪽)과 공연, 파티가 펼쳐지는 문화 공간인 L7 홍대의 루프톱 수영장. 사진 각사
19세기 말 파리의 귀족 문화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레스케이프 호텔 객실(왼쪽)과 공연, 파티가 펼쳐지는 문화 공간인 L7 홍대의 루프톱 수영장. 사진 각사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나무향이 코끝을 감쌌다. 잔잔한 장미향도 뒤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층인 24층으로 올라가자 조명의 조도가 낮아졌다. 19세기 말 프랑스 귀족의 오래된 저택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분명 서울 한복판에 있는 호텔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다른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객실로 가자 이국적인 패턴이 새겨진 실크 자수 벽지와 벽면을 장식한 그림, 카펫, 꽃문양의 캐노피 장식, 오리엔탈풍 가구가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인공지능(AI) 스피커가 ‘커튼 열어줘’라는 음성을 인식하고 자동으로 커튼을 열어줬다. 첨단 기기와 중세시대 느낌의 공간이 만나 만들어낸 이질감이 과거인 듯 아닌 듯한 재미를 준다.

요즘 이 부티크 호텔은 얼리어답터들의 성지다. 인스타그램 등 SNS에는 하루에도 수 건씩 “‘레스케이프’ 다녀왔어요”라는 후기가 올라온다. 호텔 내 차(茶) 전문점을 방문한 고객은 “아치형 천장부터 꽃으로 장식된 새장까지 독특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며 “프랑스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곳”이라고 평했다. 영국 출신 모델 나오미 캠벨, 디올옴므의 주얼리 디자이너인 윤안 등 유명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이 호텔을 다녀갔다.

레스케이프는 신세계조선호텔이 지난 7월 19일 선보인 첫 독자 브랜드 부티크 호텔이다. 신세계조선호텔은 1914년 문을 연 ‘조선호텔’의 후신으로, 1983년 삼성그룹에 편입됐다가 1991년 신세계백화점과 함께 신세계그룹으로 계열분리됐다. 이마트가 지분 98%를 소유한 신세계조선호텔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주력으로 키우는 계열사 중 하나다. 신세계조선호텔은 서울 웨스틴조선호텔과 부산 웨스틴조선호텔, 포포인츠 바이 쉐라톤 서울 남산, 레스케이프 등 4개 호텔의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다.

레스케이프는 지상 25층으로 총 204개 객실을 보유한 중급 규모의 호텔로 19세기 말 파리의 귀족 문화를 공간 인테리어의 모티브로 삼았다. 호텔 이름인 레스케이프는 ‘일상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 뉴욕 노마드호텔 등 부티크 호텔 디자이너로 유명한 프랑스의 자크 가르시아가 디자인을 맡았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세계 유명 레스토랑·바와 협업한 식음(F&B) 공간도 눈길을 끌었다.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라망 시크레’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과 협업한 메뉴를 선보인다.

레스케이프 관계자는 “파리 하면 ‘호텔 코스테’, 뉴욕 하면 ‘노마드호텔’이 떠오르는 것처럼 ‘서울’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부티크 호텔이 되는 것이 목표”라며 “독특한 경험을 원하는 외국인 개별 관광객과 여유로운 호캉스(호텔+바캉스)를 보내고 싶은 내국인을 타깃으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부티크 호텔, 외국 고객 확보에도 주력해야

최근 호텔업계는 부티크 호텔을 열며 호텔산업의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글로벌 호텔 체인 메리어트인터내셔널은 지난 4월 서울 홍대에 부티크 호텔 ‘라이즈 오토그래프 컬렉션’을 열었다. 대림그룹 산하 글래드호텔스그룹이 2016년 9월 강남에 문을 연 ‘글래드 라이브 강남’도 파티 문화를 콘셉트로 한 부티크 호텔이다. 전 객실에 음향기기 전문 업체인 하만카돈의 블루투스 스피커, 빈백 소파, 이동식 테이블을 구비했다.

호텔롯데는 2016년 1월 L7 명동을 시작으로 홍대·강남 등 주요 상권에 부티크 호텔 브랜드 L7을 선보였다. 올해 1월 문을 연 L7 홍대는 미술·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터 콘셉트의 호텔이다. 최상층에 있는 루프톱 바와 수영장은 디제잉과 공연(콘서트), 파티가 펼쳐지는 문화 공간이다. 개점 이후 매월 두 자릿수 이상 매출이 늘고 있다.

대형 호텔업체들이 부티크 호텔로 눈을 돌리는 첫 번째 이유는 이미 5성급 특급 호텔과 비즈니스 호텔시장이 포화상태이기 때문이다. 국내 호텔업계는 한동안 비즈니스 호텔을 중심으로 시장이 성장해왔다. 2011년부터 급증한 외국인 관광객의 숙박 수요를 국내 숙박업체들이 못 따라가자 정부가 호텔 용적률을 대폭 확대하면서 비즈니스 호텔 공급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한국호텔업협회에 따르면 2013년 191개(객실 2만9828개)였던 서울시 호텔 수는 지난해 399개(객실 5만3453개)로 급증했다. 넓은 부지가 필요하고 투자비가 많이 드는 특급 호텔의 경우 확장이 더뎠다.

하지만 국내 호텔업계는 지난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여파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급감하고 북핵 위협 등 한반도 긴장 상태로 일본인 관광객이 줄어드는 위기를 겪으면서 양적 성장보다는 차별화와 고급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호텔업계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부티크 호텔이다. 특급 호텔보다 비교적 좁은 면적에 지을 수 있고, 차별화된 경험을 원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성장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휴가 목적으로 호텔을 이용하는 2030 호캉스족이 많다는 점도 부티크 호텔이 늘어난 이유 중 하나다. 부티크 호텔업체들은 단순히 독특한 디자인이나 인테리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특성을 반영한 시설과 문화 콘텐츠 등을 개발해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부티크 호텔에 주력하고 있는 호텔롯데와 신세계조선호텔, 글래드호텔스그룹은 부티크 호텔이 2030세대를 주축으로 한 내국인과 외국인 개별 관광객이라는 틈새시장을 열어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현재 내국인에 치중된 고객 수요를 외국인으로 확장하는 것은 남겨진 과제다.

김홍범 세종대 호텔경영학과 교수는 “예약 채널, 마케팅 활성화로 외국인 관광객의 접근성을 높여 국내 관광업 수요와 수준을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동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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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티크 호텔 특급 호텔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건물, 인테리어, 서비스, 운영 방식 등이 독특하고 뚜렷한 콘셉트를 가진 호텔. 기존 호텔이 표준화된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부티크 호텔은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객실, 문화 콘서트 등 색다른 경험을 내세워 고객을 공략한다.

비즈니스 호텔 부대시설을 최소화하고 객실 판매에 초점을 맞춘 호텔. 호화로운 부대시설 대신 합리적인 가격과 편리한 교통, 표준화된 시설을 제공한다.

Plus Point

일본 호텔은 왜 한국에 올까

일본 최대 비즈니스 호텔 체인인 ‘토요코인’은 지난 7월 6일 서울 강남에 국내 9번째 체인인 ‘토요코인 서울 강남’을 열었다. 지난 1998년 한국에 진출한 토요코인은 7월 기준 국내에 객실 3177개를 확보하고 있다. 국내 비즈니스 호텔 대비 20~30% 저렴하다.

이미 서울에는 많은 일본계 비즈니스 호텔이 진출해있다. 소테츠의 더 스프라지르 호텔이 지난 4월 서울 명동에 오픈했고, 니시테츠의 솔라리아호텔, 일본에 본사를 둔 솔라레호텔&리조트그룹의 르와지르호텔은 서울과 부산에 각각 진출한 상태다.

일본 호텔들이 한국 시장에 진출하는 이유는 자국 호텔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은 한국 시장으로 눈을 돌려 강력한 일본 호텔 서비스와 가성비를 무기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 관광객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관광객을 잡고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내 호텔이 이 수요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성비 전략과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 마케팅 등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