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밀그럼(72·오른쪽) 미 스탠퍼드대 교수와 로버트 윌슨(83) 스탠퍼드대 명예 교수. 사진 로이터연합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밀그럼(72·오른쪽) 미 스탠퍼드대 교수와 로버트 윌슨(83) 스탠퍼드대 명예 교수. 사진 로이터연합

2020년 제52회 노벨 경제학상은 경매 이론을 깊이 연구한 미국 경제학자 두 명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10월 12일(이하 현지시각)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로버트 윌슨(83)과 폴 밀그럼(72)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를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다.

밀그럼 교수는 10월 13일 미국 서부에서 화상으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다양한 경매 방식을 동원하면 국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독과점 폐해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윌슨 교수는 “경매는 단순히 재화 공급자에게 높은 가격을 보장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원을 제대로 배분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며 “공급자가 절대 유리한 다이아몬드 원석 시장에서도 이 방식을 동원하면 독과점을 해소하면서 모든 이해 관계자가 만족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수상자들은 경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응찰자들이 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이론적으로 명확히 정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의 이론은 지금은 흔한 정부의 주파수 경매나 공항에서 특정 시간에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권리 등 기존의 방법으로 매매가 어려운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도록 새로운 경매 방식을 개발하는 데 널리 활용됐다.

이번 수상자들은 경매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게임 이론의 대가로도 꼽힌다. 모두 미시 경제학 분야다. 특히 1994년 게임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시(John Nash) 이후 게임 이론 관련 굵직한 연구를 진행해온 윌슨 교수는 어릴 적부터 경매에 관심이 많았다. 1937년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태어난 윌슨 교수는 현지에서 매주 토요일 진행된 소 경매를 지켜보면서 경매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후 그는 경매 관련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패키지 형태의 경매 방식이다.

일례로 라디오 주파수 경매에서 두 개의 주파수를 낙찰받아 두 지역에 서비스하고 싶어 하는 응찰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주파수 경매가 한 번에 하나씩 진행될 경우 첫 번째 경매에서 가격이 너무 높아져 두 번째 주파수 경매에는 참여가 어려워질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주파수를 패키지 구성해 경매를 진행할 경우 이른바 ‘승자의 저주(실제 가치보다 과도한 가격을 지급하는 상황)’를 줄일 수 있다.

이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승자의 저주’를 피하는 동시에 매각자도 적절한 이익을 얻는 매각 전략을 제안했다. 경매 시장에서 다른 사람의 반응을 비롯한 여러 변수를 고려해 매각 방식을 어떻게 설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특히 주파수와 같은 공공재를 경매할 경우 기존의 시장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밀그럼 교수는 주파수 사업권 희망 업체를 제한하되, 여럿이 경쟁할 경우 가장 비싼 값을 부르는 측에 주는 방식을 고안했다. 사용권의 대가를 비싼 값에 판매하고, 그 이득은 정부가 납세자에게 돌아가도록 한다는 게 핵심이다. 윌슨 교수는 밀그럼 교수의 박사 논문 지도교수였으며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현실에서 경제학의 유용성 높이는 데 기여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수상 결과에 대해 그들이 현실에서 경제학의 유용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 두 교수는 경매의 이론적 바탕을 체계화한 것은 물론이고 이론을 실생활에 접목하는 데 기여했다.

1993년 이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두 경제학자가 제안한 경매제도(다중라운드 오름 경매제도)를 받아들여 100여 개의 방송 주파수를 성공적으로 매각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를 계기로 다른 나라 정부도 방송 통신용 주파수 등을 경매 이론을 통해 매각하는 방안을 도입했다. 주파수 매각으로 국가 살림살이가 개선되는 동시에 국민이 납부하는 세금을 줄이는 효과를 얻었다. 한국도 2011년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다섯 차례 이들의 이론에 따라 주파수 경매를 진행했다. 2018년 6월 시행된 5세대 이동통신(5G) 주파수 매각이 다섯 번째로 진행한 경매다.

또 환경 오염 문제를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탄소배출권 거래제도 역시 이 경매 이론을 기반으로 설계됐다. 기업들이 경매 형태의 배출권 거래를 통해 환경 오염을 막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더 효율적으로 분담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노벨위원회는 “경매는 어디에서든 벌어지고, 우리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준다”며 “이들은 경매 이론을 개선했고, 새로운 형식의 경매 형태를 개발해 전 세계 매도자와 매수자, 납세자에게 혜택을 줬다”고 했다.

아울러 경제 전문가들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위원회가 지난해와는 엇갈린 선택을 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 지난해에는 증거 기반 경제학의 대표 기법 중 하나인 ‘무작위통제실험(RCT) 기법’을 활용한 개발경제학자들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갔다. 지난해 수상한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산하 ‘빈곤행동실험실(J-PAL)’의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에스테르 뒤플로 교수와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교수는 자연과학적 실험을 경제학 연구에 응용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같은 RCT 기법과 달리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접근법은 수학적 추론에 기반해 인간 행동을 예측하고, 이에 따른 제도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지난해에는 실증적 연구를 통한 개발경제학 분야의 손을 들어줬다면, 올해는 게임 이론에 기반한 미시경제학 분야의 손을 들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인호 한국경제학회장(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은 “최근 몇 년간 노벨 경제학상이 실증적 연구에 몰두했던 학자들에게 수여됐는데,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기초 경제 이론 분야에 업적을 남긴 학자들에게 돌아간 것”이라고 평했다.


Plus Point

국내서 활약 중인 제자들

올해 한국 경제학계에서 노벨 경제학상 후보군으로 거론된 학자는 없었다. 다만 국내에 수상자들의 제자들이 적지 않게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두 교수의 제자들은 현재 한국에서 법경제학, 산업조직론 등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제자인 왕규호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통적 시장의 방식을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에 의한 거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연구한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라며 “윌슨 교수는 게임 이론의 대가로 경매 이론이 아닌 게임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제자인 김정유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 경매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분야에서 방법론을 연구해낸 것이 성과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도 권남훈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의 지도교수는 폴 밀그럼이었으며, 최연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도 그들의 제자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