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왼쪽 두 번째) 대통령이 8월 2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다중대표소송제도’ 도입을 담은 ‘상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공정경제 3법이 심의·의결됐다. 사진은 이날 국무회의 모습. 사진 청와대
문재인(왼쪽 두 번째) 대통령이 8월 2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다중대표소송제도’ 도입을 담은 ‘상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공정경제 3법이 심의·의결됐다. 사진은 이날 국무회의 모습. 사진 청와대

정부와 여당이 기업을 옥죄는 이른바 기업 규제 3법(공정경제 3법) 개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경제 민주화 달성을 위한 것이다. 이 개정 법안은 다중대표소송제도 신설, 감사위원 분리선임(이상 상법),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공정거래법), 금융위원회의 금융그룹 규제 강화(금융그룹감독법) 등 기업에 대한 규제 강화가 주된 내용이다. 특히 재계가 ‘최후의 보루’로 여기는 국민의힘(야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도 최근 이에 찬성한다는 태도를 보여 논란이 커지고 있다. 오는 12월까지 열리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개정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기업 규제 3법 도입 시 독소 조항이 많아 경영권 방어는 물론 경영 활동 자체가 힘들어질 것을 우려한다. 가뜩이나 주 52시간 근무제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 정책으로 신음하는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강력한 규제까지 가해지면 기업 활동이 마비될 수 있다며 아연실색하고 있는 것. 전문가들도 시대에 맞지 않은 구태의연한 법안이라고 입을 모아 비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25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다중대표소송제도 도입 등을 담은 상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이른바 공정경제 3법을 심의·의결했다. 공정경제 3법이란 상법(법무부), 공정거래법(공정거래위원회), 금융그룹감독법(금융위원회)을 개정해 기업 경영에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우선 다중대표소송제도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소액주주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모회사 주주의 자회사 경영 간섭이 우려된다. 개정안에 따르면 비상장 회사 주식 지분의 100분의 1이나 상장 회사 지분 1만분의 1만 보유해도 해당 회사가 50% 이상 출자한 회사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데, 이 요건이 너무 완화돼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이는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법안으로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경영에 지나치게 개입해 주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감사위원 분리 선임 안도 논란이다. 이는 감사위원 1명 이상을 다른 이사와 별도 선출하고,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내용이다. 정부와 여당은 감사위원이 대주주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경영 활동을 감시하도록 하는 취지에서 이 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재계는 감사위원 선임 결정 과정에서 대주주가 배제될 수 있고, 펀드나 기관 투자자의 영향력이 커져 경영권 위협 수단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관계자는 “2·3대 주주나 해외 투기 자본이 이사회에 진출해 회사를 압박하고 부당 이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변질할 것”이라고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 고발권 폐지안도 쟁점이다. 가격 입찰 등 중대한 담합(경성담합)의 경우 공정거래위원회가 아닌 누구나 대기업을 검찰에 고발할 수 있고, 검찰 자체 판단에 따른 수사도 가능해져 고발과 수사가 남발할 것으로 재계는 우려한다.

이 밖에도 금융그룹감독법을 개정해 금융그룹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두 개 이상 금융사를 운영하는 자산 5조원 이상 비지주 금융그룹을 별도로 감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사들은 이미 금융감독원에 은행·증권·보험 등 업권별로 감독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중 규제가 될 것으로 우려한다.

정치권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자 박용만(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대한상의 회장은 9월 22일 국회를 찾아 여야 관계자에게 직접 우려를 표했다. 박 회장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기업은 생사가 갈리는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는데 기업을 옥죄는 법안은 자꾸 늘어나고 있어 걱정이 많다”라고 했다. 이날 박 회장을 비공개로 만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면담 후 기자들과 만나 “박 회장으로부터 경제인들의 우려를 전해 들었다”라며 “개정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재계의 우려를) 반영하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9월 23일 그간 증권 분야에만 한정된 집단소송제를 9월 28일부터 입법예고한 후 전분야로 확대 한다고 밝혔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중 일부가 제기한 소송 결과를 바탕으로 같은 피해를 본 모든 피해자가 함께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다.

법무부는 또 악의적으로 위법 행위를 하면 입증된 손해의 최대 5배까지 배상책임을 지게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도록 상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소송 남발이 우려된다며 당황하고 있다.


전문가들 “구시대 낡은 규제 철회해야”

많은 경제 전문가는 공정경제 3법에 대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규제안이라며 철회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J노믹스(문재인 정부 경제 정책)’ 설계자인 김광두 서강대 석좌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경제 민주화는 이미 낡은 단어”라며 “이 단어가 등장했던 1980년대와 2020년대의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노조의 힘이 강해져 현재는 노사 관계 균형추가 오히려 노조 쪽으로 기울어, 대주주 오너가 횡포를 부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특히 한국 경제의 대외 개방도도 확연히 높아져 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외국 기업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라며 “이미 적지 않은 글로벌 투기성 자금이 한국 기업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규제는 적절치 않다”라고 했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도 언론 인터뷰에서 “공정경제 3법은 허구”라며 “한국의 양극화는 재벌이 아닌 정부 정책 때문에 심해졌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어 “실제 1990년대 초반 한국은 재벌의 융성기였지만 당시 경제 분배 지수는 오히려 개선됐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상법 개정안에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 소액주주 권리를 강화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주주 독재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은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은 기관 투자가의 행동주의 수단으로 악용돼 기업의 장기 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규제 도입 타이밍이 매우 좋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오정근 자유시장연구원장은 “이미 추락하고 있는 경제의 싹부터 자르려는 ‘경제 악법’ 통과가 임박했다”라며 “기업 활력을 죽이면 일자리는 대체 누가 어디서 만드냐”라고 질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