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메드 빈 살만(왼쪽)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미국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모하메드 빈 살만(왼쪽)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미국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4년째 이어온 저(低)유가 시대가 저물고 있다.’

지난해 배럴당 40~50달러대였던 국제 유가가 어느새 80달러 안팎을 오가며 고공행진을 이어 가고 있다. 연내 100달러를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고유가로 물가가 오를 경우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에 속도를 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달러화 강세로 인한 수입 물가 상승과 미∙중 무역전쟁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흥국 경제에 부담을 가중할 것으로 보인다. 자국 통화 약세에 미국과 금리 차까지 커지면서 자금 이탈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밥 더들리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최고경영자(CEO)는 10월 18일(이하 현지시각)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포럼에서 “원유 생산국과 소비국이 조화롭게 성장할 수 있으려면 배럴당 50~65달러 선에서 유가가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1월 배럴당 27달러까지 폭락했던 국제 유가는 지난해부터 반등을 시작했다.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 중심으로 예년보다 석유 수요가 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 산유국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이 감산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에 따라 지난해 10월 올해 배럴당 유가를 평균 56달러로 예측한 세계은행은 4월 65달러로, 지난해 12월 57.2달러로 올해 배럴당 유가 평균을 전망했던 미 에너지정보국(EIA)은 5월 70.7달러로 각각 전망치를 수정했다.

최근 유가가 이마저도 큰 폭으로 뛰어넘은 데는 지난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이란 제재 부활의 영향이 크다. 이란은 OPEC 생산량의 11%를 담당하고 있다. 국제 사회의 대(對)이란 제재가 재개되면 하루 최대 200만 배럴의 이란산 석유가 국제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반(反)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을 둘러싸고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와 미국의 갈등이 고조된 것도 유가 상승을 부추긴다.

트럼프 대통령이 13일 사우디아라비아가 배후에 있다면 “엄중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자 아랍권 뉴스 채널 알아라비아는 “사우디가 (원유를) 증산하지 않으면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20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여기에 중남미 최대 산유국 베네수엘라도 잇단 실정에 따른 경제 악화와 미국, 유럽 등의 제재로 원유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어 국제 유가 상승은 당분간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상승 폭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알아라비아의 경고처럼 사우디가 석유를 무기화하는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경우 국제 유가가 배럴당 400달러 이상으로 치솟을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칼리드 알 팔리 사우디 에너지 장관은 22일 러시아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서방에 석유 수출을 중단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난달 30일 서울시내 한 주유소 가격 안내판. 사진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서울시내 한 주유소 가격 안내판. 사진 연합뉴스

美, 유가 상승 막을 것

다음 달 6일 치르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가가 크게 뛰는 것을 달가워할 리 없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략 비축유를 방출해서라도 유가를 유지할 것이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2014년 배럴당 60~80달러였던 미국산 셰일원유의 손익분기점이 최근 40달러까지 낮아졌고, 선진국을 중심으로 에너지원 다변화와 에너지 효율성 제고를 위한 노력이 열매를 맺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영국 원유 중개회사 PVM오일어소시에이츠는 최근 국제 유가가 올해 4분기 이후 배럴당 100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주요 산유국이 이란산 원유 감소분을 메울 수 있을 만큼의 증산 계획을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근거다. JP모건도 비슷한 근거를 들어 유가가 90달러 수준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반해 골드만삭스는 70~80달러 선에서 유가가 유지될 것으로 내다봤다.


Plus Point

무역전쟁에 고유가까지…韓 경제 시계 제로

미·중 무역전쟁으로 우리 기업의 수출 전선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국제 유가마저 상승하며 한국 경제의 앞날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수출에서 중국과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24.8%와 12.0%로, 합치면 36.8%에 달했다. 세계 1, 2위 경제 대국 간 ‘고래 싸움’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장기화할 경우 우리나라의 수출이 367억달러(약 41조6000억원)나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여기에 국제 유가가 지난해 저점 대비 20% 가까이 오르며 물가를 끌어올렸고, 가처분 소득이 줄면서 가계 살림을 주름지게 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2019년 한국 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국제 유가가 배럴당 80달러에 머물 경우 우리나라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0.96%, 소비는 0.81%, 투자는 7.56% 내려갈 것으로 분석했다.

유가 상승이 지속될 경우 원재료 단가가 오르면서 기업 수출 경쟁력도 나빠질 수밖에 없다. 특히 화학·항공·해운 등 유가에 직접 영향을 받는 업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항공 업계 고위 임원은 ‘이코노미조선’ 인터뷰에서 “업계 전반에서 내년 수익성 악화를 불가피하게 보고 있다”며 “연료비가 전체 비용의 25~30%를 차지하는 만큼 연비가 높은 최신 기종 항공기를 도입하고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운항 방식을 개선하는 등의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기준금리 차이가 0.75%포인트까지 벌어진 상황이어서 유가 급등으로 경기 전망이 나빠질 경우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 연준이 예고대로 12월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하고 한은 금통위가 내달 기준금리를 또 한 번 동결할 경우 금리 차는 1%포인트로 벌어지게 된다.

다급해진 우리 정부는 다음 달 6일부터 6개월 동안 유류세를 15% 인하하기로 했다. 서민과 자영업자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 내수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만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0년 전 이명박 정부가 유류세를 10% 인하했지만,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내수 진작 효과는 내지 못하고 세수만 축냈다는 비난에 휩싸인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