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창업 대부 스티브 블랭크(Steve Blank)는 스타트업이란 ‘반복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찾기 위해 구성된 조직’이라고 했다. 2016년 설립된 스타트업 밀리의서재(이하 밀리)를 탐구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 인구 감소 시대에 책이라는 아이템으로 어떻게 스케일업(scale-up·규모 확장) 비즈니스를 만들었을까. 

밀리는 월 9900원을 내면, 다양한 종류의 전자책을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는 구독 서비스다. 주 사용층은 20·30대, 누적 회원 수 500만 명이다(2022년 3월 기준). 매출은 2018년 16억원, 2019년 110억원, 2020년 192억원으로 증가했다(회사 측은 2021년 매출과 흑자 전환 여부, 월 활성 구독자 수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2020년엔 48억원 손실).

지난해 11월에는 KT 자회사 지니뮤직이 이 회사 지분 38.6%를 464억원에 인수해 최대 주주가 됐다. 밀리의 기업 가치를 1200억원 이상으로 평가한 것이다. 밀리는 올해 기업공개(IPO)에도 도전한다. 김태형 콘텐츠 본부장, 도영민 마케팅 본부장, 남기훈 기술혁신 본부장 등 부문별 최고 책임자를 만나 ‘꿀이 흐르는 마을(蜜里·밀리의 뜻)’을 키운 비결을 들었다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1│처음부터 이병헌 

본부장들은 “65%”를 주문 외듯 강조했다. 기자가 이 질문, 저 질문을 해도 이들은 다시 출판 통계를 꺼내 답을 이어 갔다. 한국 출판 시장은 인구의 5%인 독서 애호가가 전체 책 판매량의 90%를 사들이는 구조다. 인구 30%는 아예 책을 안 산다. 밀리는 1년에 책 한두 권 정도 사는 일반 대중 65%에 주목한다. 밀리가 마케팅 승부수를 띄운 시점이 빨랐던 이유다. 

밀리는 2018년 10월, 앱을 출시한 지 1년 만에 배우 이병헌을 내세운 TV 광고 캠페인을 벌였다. 투자유치금 100억원 중 상당액이 마케팅 비용으로 들어갔을 정도. 도영민 본부장은 “독서 시장 파이(크기)를 키우지 않고는 밀리의 모델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의사 결정의 바탕엔 이 65%가 있다”고 설명했다.


2│책 포맷 파괴

밀리는 책이라는 양식(format)도 계속 파괴했다. 줄글을 어려워하면 성우가 읽어주는 오디오북으로, 오디오북에도 흥미를 못 붙이면 채팅처럼 대화 형태로 만든 챗북으로, 책을 권유했다. 이병헌, 옥주현, 장기하 등 연예인이 읽어주는 책을 들으면서 ‘꿀잠’을 자보라고,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채팅형 소설로 읽어 보라는 식이다. 웹 소설 ‘놈의 기억’을 15분 형태의 오디오 드라마로 각색해 서비스하기도 했다. 

올해 3월 7일부터는 ‘밀리 라이브’라는 영상 콘텐츠가 밀리 앱의 가운데 화면을 점령했다. 주제별 크리에이터가 생방송과 실시간 채팅을 진행하는데, 간간이 책 이야기를 한다. ‘책 펴놓고 딴짓하는 요즘 독서’가 밀리 라이브의 슬로건이다. 

오디오북, 챗북 등을 만들려면 원저작자와 수익 배분을 협상해야 한다. 여러 성우를 쓰는 오디오북은 편당 1500만~2000만원의 제작비도 든다. 김태형 본부장은 “이런 2차 콘텐츠들이 독서 습관을 만드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3│삼성전자부터 태극당까지 

밀리는 영리한 협업 마케팅으로 세(勢)를 확대했다. 삼성전자 단말기 갤럭시 S20을 사면 밀리 3개월 구독을 제공하거나 음원 서비스 업체 멜론 사용자에게 20% 할인권을 뿌렸다. 카카오와 손잡고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다산북스와는 상금 2000만원을 건 SF 중단편 소설 공모전 등도 진행했다. 1980년대 나왔던 허영만 만화 ‘오! 한강’의 복간에 맞춰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과 함께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제휴할 만한 업체들 목록을 쭉 적어놓는다. 첫 미팅부터 상대방이 받아들일 맞춤형 제안서를 들고 간다.” 도 본부장이 전하는 영업 비밀이다. 


기술도 트렌드다

4│뷰어 집중 투자

밀리 초기엔 전자책 뷰어(Viewer·전자책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개발을 외주에 맡겼다. 말썽이 많았다. 뷰어가 밀리 서비스의 핵심 요소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밑줄 긋기, 글자 크기 조정, 오디오 재생 등이 모두 원활해야 한다. 밀리는 상당한 개발 인력을 뷰어 고도화에 투입하고 있다. 뷰어에 개발팀의 다년간 노력이 집약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엔 시선 추적 업체와 손잡고 눈으로 책 페이지를 넘기는 기술까지 뷰어에 적용했다.

남기훈 본부장은 “개발자도 트렌드에 민감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객의 눈높이는 계속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능을 추가하면 앱 안전성이 떨어진다. 개발자가 매번 마주하는 딜레마다. 그렇다고 변신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게 남 본부장의 설명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보는 개발자의 자질도 도전하는 자세다.” 


5│지수 상품화 

밀리가 이용자 빅데이터로 일종의 지수를 만들고 이를 서비스에 녹여 넣은 점도 눈에 띈다. 밀리 ‘완독 지수’는 완독할 확률, 완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알려주고, 밀리 픽(회원들이 검증한 책), 홀릭(술술 읽히는 책), 마니아(취향 저격이 분명한 책), 히든(아직 회원들이 발견하지 않은 책) 등 책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준다. 이용자들이 책 선택에 보조적으로 지수를 활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 지수는 밀리 콘텐츠 제작에도 활용된다. 김 본부장은 “소설 ‘불편한 편의점’은 밀리가 띄워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첫 사례”라면서 “완독 지수(79%)가 높은 걸 보고, 앱 메인 화면 노출과 오디오북 제작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본부장들은 밀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개인화와 커뮤니티를 꼽았다. 나한테 맞는 책을 만나지 못하면, 밀리가 보유한 전자책 11만 권도 그림의 떡이다. 밀리가 서비스 초기부터 밀었던 ‘서재 꾸미기’와 ‘서재 공유’는 일종의 커뮤니티 서비스인데 반응이 좋지는 않다. KT와 만난 밀리의 2막은 곧 시작된다.


Plus Point

KT가 밀리의서재를 인수한 이유는

우선, KT 고가 통신 요금제 고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서비스라고 봤다. 최근 KT는 5G 요금제 혜택을 강화하며 ‘초이스’ 요금제를 밀고 있다. 이 요금제 가입자들은 시즌믹스(영상), 지니스마트(음악 감상), 블라이스스토리(웹 소설), 게임박스(스트리밍 게임), 밀리의서재(전자책) 등 원하는 콘텐츠를 골라서 구독할 수 있다. 지니뮤직도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지니’와 ‘밀리의서재’를 결합한 번들형 요금제를 출시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강화하는 KT가 밀리를 통해 IP(지식재산권)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인수 배경으로 꼽힌다. KT가 밀리 제휴 출판사를 통해 원저작자들과 빠르게 협의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 밖에 KT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밀리 오디오북을 제작하는 등 KT가 원천 기술을 응용하는 기회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