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난’을 일으킨 조현아(왼쪽)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사진 연합뉴스
‘남매의 난’을 일으킨 조현아(왼쪽)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사진 연합뉴스

“차기 동일인(총수)을 누구로 할지 내부적 의사 합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5월 8일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기자들 앞에 선 김성삼 공정위 기업집단국장이 5월 10일로 예정했던 ‘2019년 대기업 집단 지정 현황’ 발표 일정을 닷새 미룬다고 밝히면서 그 이유로 한진그룹을 언급했다. 김 국장은 “한진 측이 기존 동일인(고(故) 조양호 회장) 작고(作故) 이후 차기 동일인을 정하지 못했다”며 “일단 발표 일정을 미루고 한진의 자료 제출을 기다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많은 재계 관계자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앞서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은 지난해 4월 24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을 한진칼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했다. 부친 조양호 회장이 타계한 지 16일 만이었다. 이사회는 “리더십 공백을 최소화하고 그룹 경영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그룹 관계자도 “장례 기간에 유족들이 조원태 사장 중심으로 가겠다고 뜻을 모았다”고 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한진그룹은 공정위에 동일인 변경 신청서를 전달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진은 제출 기한을 넘겼고, 공정위가 이 사실을 공개하면서 가족 간 갈등 상황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동시에 “조원태 사장이 그룹 장악을 위해 먼저 치고 나간 것일 수 있다”는 분석에도 힘이 실렸다. 결국 공정위는 지난해 5월 15일 직권을 활용해 조원태 회장을 한진그룹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조 회장 입장에선 내부 합의가 아닌 외부 도움으로 총수 자리에 오른 셈이다.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하던 한진 오너가(家)의 경영권 분쟁이 최근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조양호 전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남동생(조원태 회장) 중심의 지배구조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부터다. 조 전 부사장은 지난해 12월 23일 법률 대리인을 통해 “조원태 회장이 고 조양호 회장의 공동경영 유훈과 다르게 한진그룹을 운영해왔고, 지금도 가족 간 협의에 무성의와 지연으로 일관한다”고 비난했다.

조 전 부사장에 따르면 조양호 회장은 생전에 가족이 공동으로 한진그룹을 운영해 나가라고 주문했다. 임종 직전까지도 형제 셋이 꼭 함께하라고 당부했다. 조 전 부사장은 “조원태 회장이 공동경영에 무성의한 자세를 보인 결과 한진그룹은 선대 회장의 유훈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한진그룹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주주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협의하겠다”고 했다.

국내 대기업 초유의 ‘남매의 난(亂)’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현 갈등 상황이 앞으로 어떤 국면을 맞이할지 예측하느라 바쁘다. 일단 오너가의 지분율만 놓고 보면 가족 다툼이 막장까지 치달을 가능성은 작다. 자칫하다가는 경영권을 통째로 외부에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원태+델타 vs 조현아·현민·이명희…KCGI 변수

한진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인 한진칼 지분율을 보면 조원태 회장 6.52%, 조현아 전 부사장 6.49%, 조현민 한진칼 전무 6.47%,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 5.31% 등이다. 조양호 회장이 유언장을 남기지 않아 민법상 상속 비율로 유산을 나눈 결과다. 여기에 재단 등 특수관계인 지분 4.15%까지 더하면 오너 일가의 지분율은 28.94%가 된다.

문제는 한진칼 경영 참여를 선언한 행동주의 펀드 KCGI가 지분율을 17.29%까지 늘려 단일 최대 주주에 등극했다는 점이다. KCGI는 2018년 말부터 한진칼 지분을 꾸준히 모았다. 만약 33.38%에 이르는 외국인·개인 등 기타 주주가 오는 3월 열리는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KCGI에 힘을 실어준다면, 조원태 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조 회장이 한진칼 사내이사를 연임하려면 출석 주주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남매가 주총 전 갈등을 봉합할 수 있다는 관측이 흘러나오는 이유다.

또 다른 주요 주주인 미국 델타항공(10.00%)과 대호개발(6.28%)은 한진그룹의 우호 세력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들 기업이 남매 중 어느 한쪽과 결탁해 다른 형제를 밀어내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경우에도 한진칼 지분은 4.11%에 불과하지만,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예고한 만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지분을 끌어모으고 경영권 개입에 나설 수 있다.


요동치는 한진칼 주가

한진그룹 구성원은 조 전 부사장의 돌발행동에 우려를 나타냈다. 대한항공 일반직 노동조합은 지난해 12월 24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최근 항공 산업이 외부 악재로 악화 일로를 걷고, 항공 업계 종사자의 일자리와 노동 환경도 악영향을 받는 불안한 시국이 전개되고 있다”며 “이런 시점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조 전 부사장의 경거망동한 행동이 과연 대한항공 2만 노동자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이번 분쟁을 예의주시하는 건 주식시장 참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슈가 불거진 후 한진칼뿐 아니라 대한항공의 주가도 요동치고 있어서다. 경영권 사수를 위해 주주 친화적인 행보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과 가족 갈등의 소용돌이가 회사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투자심리에 고스란히 반영돼 주가 급등락을 야기하고 있다. 롤러코스터 주가는 저가 매수 또는 차익 실현의 기회가 된다.

지난해 12월 20일 유가증권시장에서 3만8500원에 거래를 마친 한진칼은 23일 4만6200원으로 급등했다. 이 회사 주가는 24일 오전 한때 5만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약세로 전환해 결국은 7%대 하락 마감에 그쳤다. 대한항공도 20일 2만7800원에서 23일 2만9100원으로 치솟았다가 24일 2만8000원으로 떨어졌다.


Plus Point

후회로 끝난 형제의 난… “모든 게 허무”

한진그룹 오너가의 형제 갈등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2년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형제 간 다툼이 벌어졌다. 첫 분쟁은 조중훈 회장 별세 이후 발견된 1000억원 상당의 현금과 정석기업 주식 7만 주의 배분 문제를 논의하면서 발생했다. 차남 조남호 회장과 4남 조정호 회장이 “상속 비율대로 분배해달라”고 요구한 것을 장남 조양호 회장이 거절하자 둘은 장남을 상대로 정석기업 주식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이 법적 다툼은 7년간 이어졌다. 조남호·정호 형제는 2006년과 2008년에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그런데 지난해 조양호 회장이 별세하자 조남호 회장은 “그동안 형제가 다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다퉜다. 모든 게 아쉽고 허무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