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저장성 항저우로 가는 고속철 열차가 상하이역에 대기 중이다. 사진 블룸버그
중국 저장성 항저우로 가는 고속철 열차가 상하이역에 대기 중이다. 사진 블룸버그

6억4000만 인구의 동남아시아 고속철 사업을 둘러싼 ‘중·일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 둔화 속에 채산성 악화를 우려한 일본 기업들이 한발 물러서고 있는 반면, 중국 기업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수주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동남아를 자신들의 텃밭으로 삼고 있는 일본이 물러선다면, 동남아 교통·물류 인프라 건설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도 큰 부담이다. 안 그래도 미·중 무역전쟁과 중국 자체의 부채버블로 올해 험난한 한 해가 예상되는데, 채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동남아 교통 인프라 수주가 중국으로서는 또 하나의 큰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철도 수주 세계 8위인 일본 히타치와 일본 굴지의 종합상사 이토추는 최근에 총공사비 70억달러(약 7조8400억원)의 방콕 고속철 건설 수주전에서 발을 빼기로 했다. 태국 정부의 별다른 지원 없이 노선 운영과 관련 부동산 사업을 통해 수익을 챙겨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일본경제신문은 최근 보도에서 “태국 철도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일본 기업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며 “(발을 들여놓을 경우) 천정부지의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간부의 말을 인용했다. 태국의 고속철 운임은 일본 고속철인 신칸센(新幹線)의 4분의 1에 불과해 수익을 내기 어려운 데다 저비용항공(LCC)과도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또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고속철 구간의 경우 대도시가 밀집한 일본과 달리 역마다 승객 수가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다.

해당 고속철도는 방콕의 돈 므앙 공항과 쑤완나품 공항, 동남부 라용주(州)의 유타파오 공항 등 공항 세 곳을 연결하는 220㎞ 구간에 건설되며, 2023년 운행을 시작할 예정이다. 개통되면 차로 2~3시간 걸리는 돈 므앙~유타파오 구간을 45분 만에 주파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입찰 기업 중에는 국영기업 차이나리소스와 중국철로총공사(CRC)와 방콕 대중교통인 스카이트레인 운영업체인 BTS 그룹 홀딩스 등이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는 태국과 ‘한-태국 고속철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입장에서 대형 호재일 것 같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하진 않다. 중국은 지난해 무역수지 흑자 폭이 2013년 이후 5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미·중 무역전쟁 여파로 경기가 둔화되면서 최악의 경우 올해 경제성장률이 2%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여기에 중국의 인프라 투자에 대한 여론도 크게 나빠졌다.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등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 참여국들이 중국에 빌린 과중한 부채 때문에 잇달아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핵심 우방국인 파키스탄은 일대일로 사업과 관련, 지금까지 620억달러 규모의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들였고, 결국 국가 부도 위기를 맞았다. 스리랑카는 2010년 중국의 자금 지원을 받아 지은 함반토타 항구로 인한 부채 상환 압박에 시달리다 2017년 말 항구 운영권을 중국에 99년간 넘겨주는 협정을 체결했다.

일대일로 관련국의 부채 위기는 중국에도 큰 악재다. 투자한 돈 대부분이 회수하기 어려운 부실채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 사이에서도 “중국에 있는 중국인을 위해 투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엉뚱한 곳에 돈을 쓰냐”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 사업도 제동

그런데도 중국이 동남아 고속철 굴기(堀起·우뚝 섬)의 야심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고속철 건설로 중국과 동남아 간 인적·물적 교류가 늘면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커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은 윈난성 쿤밍(昆明)에서 시작해 라오스와 태국, 말레이시아를 거쳐 싱가포르에 이르는 총연장 약 3000㎞의 ‘범아시아 철도(Pan-Asia Railway)’ 건설을 추진 중이다. 범아시아 철도는 중국과 동남아를 잇는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프로젝트다. 여기에는 쿤밍에서 시작해 라오스, 태국, 말레이시아를 거쳐 전략적 요충지인 믈라카 해협의 무역항 클랑으로 이어지는 140억달러 규모의 말레이시아 동부해안철도(ECRL·일반 철도)가 포함된다. ECRL은  2017년 8월 착공했지만, 지난해 말레이시아 정부가 과도한 비용 부담을 이유로 공사를 중단시켰다. 공사 재개 시점은 추후 통보한다는 입장이다.

중국이 범아시아 철도에 특별히 기대를 거는 부분은 역내 최고 선진국인 싱가포르와의 연결이다. 싱가포르는 미군 주둔 지역으로 동남아에서 미국의 입김이 가장 센 곳이다. 따라서 고속철을 통한 싱가포르와의 교류 확대는 역내 미국 영향력 확산 방지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싱가포르는 중국으로 들어오는 중동산 석유의 최대 수송로인 믈라카 해협의 관문이기도 하다. 중국은 세계 3대 석유 수입국이지만 원유와 원재료의 90% 이상을 해상운송을 통해서 수입한다. 그런데 믈라카 해협과 대만 해협, 바시 해협(대만과 필리핀 사이 해협) 등 수송로에 인접한 국가들은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다.

범아시아 철도가 개통되면 유사시 앞서 언급한 해상 루트를 거치지 않고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물자 수송이 가능해진다는 이점도 생긴다. 중국이 범아시아 철도의 첫 시작인 쿤밍~비엔티안(라오스의 수도) 구간 고속철 건설을 60억달러에 이르는 총비용의 70%를 부담하면서까지 밀어붙인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범아시아 철도가 중국의 구상대로 완성을 보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일대일로 추진 과정에서 파키스탄이나 스리랑카에 생긴 일들이 고속철 사업 추진 과정에서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약 2460달러의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중국에 비교적 호의적인 라오스에서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라오스의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총공사비의 30%인 18억달러도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공사 현장 인력이 중국인으로 채워지면서 기대만큼 라오스인의 고용이 늘지 않았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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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로(一帶一路) 중국이 추진 중인 신(新)실크로드 전략. 시진핑 (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처음 제시했다. 일대(一帶)는 중앙아시아~유럽을 잇는 육상 교역로, 일로(一路)는 동남아시아~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해상 교역로를 말한다. 일대일로 선상에 있는 60여 개국의 인구는 44억 명, 경제 규모는 21조달러다.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63%, 29%에 달한다. 중국과 동남아를 잇는 ‘범아시아 철도’ 건설은 일대일로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