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윤정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상무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 전 크레디트스위스·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근무, 전 D3쥬빌리파트너스 이사 / 사진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진윤정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상무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 전 크레디트스위스·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근무, 전 D3쥬빌리파트너스 이사 / 사진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진윤정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상무는 비정형적인 커리어를 쌓은 투자 심사역이다. 유럽계 최대 투자은행(IB)인 크레디트스위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에서 기업의 인수합병(M&A)을 도우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이력을 얻었지만, 돌연 사표를 던지고 벤처캐피털(VC)에 둥지를 틀었다. 

2014년 진 상무는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최초의 여성 심사역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 7년간 동남아시아(동남아)의 유망한 벤처·스타트업에 두루 투자하며 회사의 중역으로 성장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가 초기에 발굴한 인도네시아 증권 거래 업체 아자이브는 이후 리카싱(李嘉誠) 청쿵그룹 회장이 이끄는 호라이즌스벤처스로부터 후속 투자를 받기도 했다.

진 상무는 그 외에도 인도네시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토코피디아에 대한 투자 심사를 맡았으며, 싱가포르 온라인 쇼핑 업체 숍백과 인도네시아 소셜 커머스 플랫폼 슈퍼, 싱가포르 자산관리 플랫폼 엔다우어스, 인도네시아 물류 기술 플랫폼 웨어식스, 인도네시아 음식 배달 서비스 여미코프 등에도 투자했다. 

최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사무실에서 진 상무를 만나 투자에 얽힌 비화와 투자 철학 등을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VC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미국 뉴욕에서 뱅킹 업무에 종사하며 바이사이드(buy-side·자금을 투자하고 운용하는 업계)에 대한 환상과 갈증이 늘 있었다. 셀사이드(sell-side·증권 업계)에서 기업 인수합병을 주선하거나 조언하는 일도 의미 있었지만, 나도 언젠가는 바이사이드에서 어려운 결정을 한번 내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항상 있었다. 그러다 MBA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 인근에서 했는데, 팰로앨토에 VC가 워낙 많지 않은가, 그때 VC에 눈을 떴고 정말 즐거운 일을 하면서 내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소프트뱅크벤처스에서 제일 처음 맡았던 투자 건은 무엇인지
“싱가포르에서 식료품 판매 플랫폼을 운영하는 레드마트였다. 우리나라 마켓컬리와 비슷한 회사로 볼 수 있다. 이강준 전 상무(현 두나무앤파트너스 대표)가 투자를 검토했던 회사인데, 레드마트 투자 업무를 하면서 정말 많이 혼났다. IB에서는 리서치하거나 시장 규모를 볼 때 컨설팅 업체에서 쓴 보고서를 많이 인용하지만, 이 전 상무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정보를 인용해서 쓰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왜 이 사업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지, 미래를 예측해보라고 조언했다. ‘이미 존재하는 숫자’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사진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사진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VC가 앞날을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어떤 창업자가 ‘파도를 잘 탈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산업이나 섹터가 ‘파도’라면, 그것을 타는 일은 창업자의 몫이다.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을 때 그 위에 잘 올라탈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야 한다.”

직접 투자한 회사 중에도 그런 곳이 있었나
“2018년에 투자한 인도네시아 증권 플랫폼 업체 아자이브가 전형적인 예다. 창업자들이 스탠퍼드대 MBA 후배들이었는데, 나이는 스물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똑똑하고 야망도 커서 잠재력이 대단하다는 평이 많았다. 솔직히 당시에 그들이 하던 사업 자체는 매력적으로 와 닿지 않았지만, 언젠가 인도네시아에 핀테크 혁명이 온다면 그 변화 속에서 파도를 가장 잘 탈 수 있는 창업자가 그들이라고 확신했다. 창업자의 가능성만 보고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아자이브는 결국 기대에 부응했는지
“이후 증권 거래 중개업 면허를 취득하고 우리나라 토스 같은 핀테크 회사로 전환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핀테크 바람이 불자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 증권 거래 앱을 출시했을 때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에서 80개 증권사 중 79등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3등까지 올랐다. 아자이브는 이후 홍콩 재벌 리카싱이 운영하는 VC에서도 투자받고, 올해 3월에는 글로벌 1위 핀테크 투자사 리빗캐피털의 주도로 6500만달러(약 772억원)를 투자받았다. 현재 기업 가치가 3000억원이 넘으니, 내가 투자했을 때보다 30배 정도 오른 셈이다.”

성공할 창업가를 어떻게 알아보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해결하고 싶은 문제에 대해 열정이 넘치고 신나서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그들은 일과 삶을 따로 구분해 놓고 있지 않아 쉽게 지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있다. 나는 그런 좋은 에너지를 믿는 편이다.”

동남아 스타트업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데, 현지 시장은 어떤가
“토코피디아와 고젝(인도네시아 최대 온라인 운송 기업으로 올해 토코피디아와 합병했다) 같은 동남아 1세대 스타트업들이 만들어진 시기가 2008~2009년이니, 이후 10년이 흐르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세대 스타트업들이 데카콘(기업 가치가 10조원이 넘는 스타트업)으로 성장하며 그 회사에서 많은 사람이 나와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있다. 페이팔 출신으로 성공한 창업가들을 뜻하는 ‘페이팔 마피아’처럼 ‘토코피디아 마피아’ ‘고젝 마피아’가 생기는 것이다. 현세대 창업가들은 1세대 스타트업들의 성공을 목격했기 때문에 창업에 대한 두려움도 크지 않다. 또 동남아 시장에 중국계 자본이 많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 중국계 자본은 원래 인도 시장에 많이 유입됐는데, 인도와 중국 간 국경 분쟁이 가열되면서 그 많은 돈이 인도 대신 동남아에 들어가고 있다.”

투자 심사역으로서 진 상무가 가진 경쟁력은 무엇인지
“나는 ‘돈만 투자하고 입을 싹 닫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늘 강조하고 ‘문제나 고민이 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전화해달라’고 항상 당부한다. 그래서 문제가 터지면 나를 먼저 찾는 창업가들이 너무 많다. 새벽에도 전화 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투자를 결정할 때 특히 중요시하는 요소는
“대표이사뿐 아니라 최고기술책임자(CTO)와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C 레벨’의 주요 멤버들을 전부 만나본다. 많은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대표를 보고 투자한다고 하는데, 나는 회사의 핵심 멤버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어울려 잘 지내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의 약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또 그것을 대표가 아는지도 궁금하다. 대표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다른 사람을 통해 보완할 방법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채용 담당자도 꼭 만나본다. 직원을 어떤 철학으로 채용하는지 묻는다.”

VC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최전방에 있는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일이니, 누가 해도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VC업에 잘 맞는 것 같다. 항상 자신이 옳아야 하고 지적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이 일과 맞지 않다. 그른 판단으로 어떤 회사에 초기 투자할 기회를 놓쳤다면, 뒤늦게라도 그 회사에 찾아가 ‘내 돈을 받아달라’고 부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VC 업계 밖에서는 성공적인 투자 사례만 보고 ‘몇 배를 벌었다’는 것에만 주목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장례식’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투자한 모든 회사가 잘될 수는 없다. 그것을 감당할 마음의 각오가 돼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