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철 금융통화위원이 5월 8일 서울 세종대로 한은 본관에서 오찬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한국은행
조동철 금융통화위원이 5월 8일 서울 세종대로 한은 본관에서 오찬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한국은행

일본은 1990년대 들어 부동산 버블 붕괴 등으로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릴 정도의 경기침체였다.

디플레이션, 즉 지속적인 물가 하락은 가계와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의 소비와 투자를 갉아먹는다. 가계는 지금 물건을 사기보다 더 기다려 가격이 떨어지면 사야겠다는 심리 때문에 소비를 줄이게 된다. 기업은 각종 비용을 계산해 물건을 만들고 가격을 매겼는데 나중에 더 낮은 가격에 물건을 팔아야 하거나 물건이 잘 팔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에 투자를 줄이게 된다.

디플레이션하에서는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의 가격이 하락하기 때문에 현금을 보유하거나 현금에 준하는 채권 등에 투자하는 게 유리하다. 채무자의 채무액은 실질가치가 상승(실질 채무 증가)하기 때문에 자금을 대출받지 않으려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런 상황 역시 소비와 투자를 꺼리게 한다. 경제가 말 그대로 축소지향적으로 가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들은 저성장·저물가의 덫에 빠졌다. 디플레이션은 아니지만 장기간 저물가 현상이 지속하면서 경제가 활력을 잃어 소비와 투자가 정체되고 있다. 자동차와 세탁기, 컴퓨터의 발명이나 인터넷 혁명처럼 대규모 수요를 촉발시킬 수 있는 기술혁신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2013년부터 7년 연속 1%대 이하의 저물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조동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5월 8일 기자간담회에서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기조적 물가의 안정(지속적인 저물가 현상)은 실물경기의 안정뿐 아니라 우리 경제가 ‘축소 순환’의 늪에 빠질 가능성을 경계하게 한다”고 밝혔다.

조 위원은 “저금리 환경하에서 금융 안정을 고려한 통화정책은 보수적으로 운용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며 이는 기대인플레이션(1년 후 물가에 대한 기대치)을 목표 수준(물가 안정 목표 2%)으로 복귀시키기 어렵게 함으로써 저금리 환경을 더욱 심화시키는(저물가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올리기 어렵다는 의미) 축소 순환을 야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해도 한은이 가계부채 문제 등 금융 안정에 중점을 둬야 한다면, 디플레이션 우려를 막기 위한 금리 인하에 나서기 어려워질 수 있다. 경기에 적절히 대응할 만한 통화정책을 쓰지 못한다면 저성장, 저물가 상황이 고착화되고 시장금리 역시 낮은 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조 위원은 이 같은 상황을 ‘축소 순환’이라고 표현했다.

조 위원은 “이러한 축소 순환의 지속은 우리 경제에 예상치 못한 부정적 충격이 가해질 때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위험을 증대시키게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2013년부터 물가상승률이 2%에 미치지 못했다. 2013~2015년 물가 안정 목표는 2.5~3.5%였으나 2013년과 2014년 물가상승률은 각각 1.3%였고, 2015년은 0.7%였다. 2016년부터 물가 목표를 2%로 하향조정했으나 2016년 1.0%, 2017년 1.9%, 2018년 1.5%로 여전히 목표에 미달했다. 올해 1~4월 물가상승률은 0.5%다.

흔히 물가 상승은 경기 상승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경제 성장을 기대하면 투자와 소비가 늘어나게 되고(수요 증가) 이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지나친 물가 상승은 통화가치 하락, 실물자산 선호 등 부작용을 낳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전통적으로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쪽으로 통화정책을 써왔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저물가 현상이 고착화됐다.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1990년대 일본식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선진국 중앙은행의 역할도 물가 안정보다 경기 활성화, 디플레이션 우려 방지 쪽으로 선회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이 막대한 규모의 양적완화를 지속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나라도 2011년 한은의 목적에 기존의 ‘물가 안정’에 ‘금융 안정’을 추가했다. 한은법 1조에 ‘이 법은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하여 물가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로 돼 있었는데 2항을 신설해 ‘한국은행은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할 때에는 금융 안정에 유의하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조 위원은 ‘금융 안정’이라는 보조적 목적 때문에 한은이 경기 대응에 소극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조 위원은 “2012년 이후 우리나라 통화정책은 경기지표가 불안하고 상당 기간 인플레이션이 목표 수준을 하회하는 상황에서도 물가 안정보다 ‘금융 안정’을 고려한 보수적 정책기조가 유지된 적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제 우리도 장기간에 걸쳐 목표 수준을 큰 폭으로 하회하고 있는 ‘지나치게 낮은 인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할 시점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적 정책 기조의 결과, “금융시장에서는 물가상승률이 통화당국의 목표(2%) 수준으로 회귀하기보다는 낮은 수준을 지속하거나 하락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기대하게 되며 이는 장기금리의 하락을 초래함으로써 통화정책 공간(기준금리 인상 또는 인하 여지)을 축소시켜 왔다”는 것이다.

조 위원은 “현재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장기금리가 0%에서 멀지 않은 수준까지 하락해 전통적인 금리정책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 유사한 상황이 우리에게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나 한은 관계자가 일본식 디플레이션을 처음 언급한 것은 박근혜 정부 때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최 전 부총리는 2014년 8월 말 “한국 경제가 (일본식) 디플레이션의 초입에 와 있다”고 밝혀 논란을 자초한 뒤 이후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저물가)”이라고 물러섰다.

최 전 부총리는 2014년 7월 취임 당시에는 ‘축소 균형’의 심각성을 공식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내수부진이 ‘저성장→저물가→경상수지 과다 흑자’로 이어지면서 우리 경제가 심각한 축소 균형을 향해 가고 있다”며 “이런 현상들은 일본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보여왔던 패턴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당시 최 전 부총리의 발언은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심화시켜 경제심리를 악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조 위원의 발언에 대한 반응은 다르다. 약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저성장, 저물가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2013년부터 약 7년간 물가상승률이 1%대 이하의 저물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면 한은이 좀 더 과감한 통화완화 정책을 추진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기축통화국은 아니기 때문에 양적완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낮은 인플레이션’을 타개하는 쪽으로 한은의 정책방향을 전향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